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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Apr 20. 2017

희미한 기억

미국 '하와이'

때때로 어떤 일들은 시간을 따라 흘러가버린다. 여행의 기억도 별 다르지 않다. 사진을 거의 남기지 않았던 시절은 더욱 빠르게 흐려지고 말았다. 한번 희미해진 기억은 좀처럼 선명해지지 않는다. 요즘은 소소한 장면을 기록하려는 편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지난날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쉽다.  



"하와이(Hawaii)"

태평양 한가운데에 위치한 하와이(Hawaii)는 화산 폭발로 태어난 8개의 섬을 일컫는다. 일부 지역은 아직도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신혼여행지로 손꼽힐 만큼 인기가 많은 탓에 물가도 비싸다. 하지만 주요 관광지를 벗어나면, 더없이 한적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만날 수 있다. 게다가 모나지 않은 기후 덕분에 어느 계절에 가더라도 다 괜찮다.

Hanalei Valley Lookout, KAUAI



언제나 초여름 같은 섬. 싱그러운 날씨에 마음이 둥글둥글해졌다. 잘 먹고 잘 자란 나무들이 촘촘하게 만들어준 그늘을 지난다. 바람에 실려오는 짙은 숲 향기에 맑아지는 정신. 사실 과학의 도움으로 도로를 달리고 있지만, 젊음이 넘치는 대자연이 등을 밀어주는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쩐지 따뜻하고 건강한 힘이 느껴졌다.



쉴 새 없이 모여들었다가 흩어지는 구름. 갑자기 몰려든 구름이 순식간에 비를 퍼붓고 지나갔다. 한껏 물을 마신 초목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반짝인다.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우리가 별다른 의문 없이 삼시세끼를 먹는 것과 비슷하려나.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일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들을 떠받치는 흙은 온통 붉은색을 띤다. 토양의 성분 때문이겠지만, 막상 그 위로 힘차게 자라난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비롭다는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쬘수록 더욱 발갛게 달아오르는 민낯.

Waimea Canyon Lookout, KAUAI



아직 한창때의 섬에는 열기가 가득하다. 까만 벌판을 뒤로 밀어내며 하늘을 향해 나아갔다. 고도에 조금씩 적응해가며 한참을 오르면, 세상 모든 구름이 발아래 놓인다. 이따금 구름이 무지개를 타고 넘는 장면이 펼쳐지기도 한다. 구름링을 낀 산봉우리에 앉아 도를 닦는 신선의 시야에는 이런 게 보이지 않을까.  


구름층보다 고도가 높은 덕분에 반짝이는 밤하늘을 만날 수 있는 곳. 땅에서 하늘로 어둠이 번지면 별빛이 쏟아진다. 몇천 미터를 올라왔다 한들, 아직도 우주와 나 사이는 이렇게 멀다. 인류의 욕망은 그를 삼키고도 남을 정도로 부풀었지만, 우리는 이 넓은 세상에서 아주 희미한 존재일 뿐이다.

Mauna Kea Mountain, Hawaii(Big Island)



온통 까만 밤을 건너 물가로 돌아왔다. 그래도 바다는 하늘보다 친숙한 세계다. 서핑보드를 붙잡고 바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수면 아래로 머리를 들이밀고 남의 세상을 훔쳐본다. 뭍에 나온 바다표범과 거북이는 우리의 수영 솜씨는 관심 없다는 듯 선탠을 즐기고, 바닷속에는 하이패션으로 무장한 열대어가 바삐 움직이고 있다.

Hanalei Beach, KAUAI


숨겨놓은 절경을 보겠다고 보트를 타고 먼 바다로 향했다. 밤하늘만큼이나 짙은 물빛 앞에서 또 한 번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깊이 조차 가늠하지 못하면서 모든 것을 손에 쥐려 하지 않았던가. 바다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유유히 헤엄치는 거북이나, 저 멀리서 뛰어오르는 고래의 세상이다.




먹구름이 소나기를 몰고 올 땐 언제고 이내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다. 계속해서 온갖 색이 지나가는 곳. 끓는 물 위의 냄비 뚜껑처럼, 사춘기 시절의 마음처럼, 계속해서 펄떡거린다. 언젠가 간절히 그리워할 지금 이 순간.

Kona in Restaurant, Hawaii(Big Island)


다른 ‘사람’의 삶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상’에 드나든 기분이 들었다. 다양한 생명, 비와 구름, 바람과 햇빛, 인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주인인 세계에서 먼지가 되어 둥둥 떠다닌 것 같기도. 오늘도 멀어지는 기억이 아쉬워 몇 장 되지 않는 사진을 꺼내본다. 낯선 세상도, 너의 모습도, 조금 더 붙잡을 수 있었으면.

잊혀져 가는 나의 기억이, 다시 생각날까

-전람회, 기억의 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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