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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Sep 08. 2017

안개 속의 마을

울릉도 ‘나리분지’

타고나길 게으르고 굼뜬 데다 숨찬 것은 아주 질색이다. 그래서 평소에는 좀처럼 달리거나 오르지 않는데, 여행 중에는 오히려 높은 곳을 찾게 된다. 수많은 계단과 꼬불꼬불한 오르막길의 괴로움이 잊힐 만큼 멋진 풍경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울릉도 ‘나리분지’

바다 근처가 아니면 경사를 피할 수 없는 섬에서 홀로 평평한 곳이 있다. 화산 활동 후 분화구가 무너져 생긴 나리분지. 사람들이 터를 잡은 후로 조금 더 평탄하게 다져졌다. 남쪽 방향에 있는 성인봉을 오르다 보면 분지의 전경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성인봉과 함께 엮어서 다녀가기도 한다.



성인봉으로 향하는 오솔길의 양 옆으로 수풀이 무성하다. 일부는 침식이 심한 울릉도의 사정을 말해주듯 뿌리를 훤히 드러냈다. 어깨를 바짝 맞대고 선 나무 때문에 제법 두꺼운 그늘이 드리워지지만, 그 틈에서도 꽃은 핀다. 오늘은 짙은 안개가 세상을 휘감을 기세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것이 안개 속에 숨어버렸다. 표지판이 무색할 만큼 사방이 회색빛이다. 아쉽지만 분지의 전경은 상상으로 남겨둘 수밖에. 좋게 생각하면, 잔잔한 물결을 타고 섬에 들어온 것도, 등산과 거리가 먼 내가 이토록 짙은 산안개를 만난 것도 충분히 특별한 일이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안개 숲길은 판판하게 잘 닦인 길로 이어졌다. 빠르게 요동치는 구름 덕분에 주변 풍경이 시시각각 다르게 보인다. 적당히 구획을 나눈 밭, 몇 채의 집, 그리고 관광객을 상대하는 식당이 있는 작은 마을. 군데군데 열매를 맺은 농작물과 활짝 핀 꽃이 색을 더한다. 세상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나무와 짚을 덮은 전통가옥은 한적한 시골 풍경과 어우러져 과거를 상상하게 한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지붕의 처마에서 땅바닥까지 외투를 입는 것처럼 외벽(우데기)을 만들어주었다. 건물과 외벽 사이의 공간은 통로이자 창고였고, 한여름에는 그늘막이 되어주기도 했다.



전망 좋은 곳에 갈 때는 날씨 변화에 민감해진다. 오르는 길이 아무리 좋다 해도 숨 가쁜 순간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기대와 다른 하늘을 마주치면 몹시 아쉬웠다. 그래도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거나, 가끔은 오늘같이 변화무쌍한 풍경을 만나 색다른 즐거움을 얻기도 하니까, 어쨌든 지루한 여행길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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