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4-1] 포브지카 계곡 (Phobjika Valley)
어젯밤에 하늘을 채웠던 구름이 길을 떠난 아침이다. 날씨는 의지로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라 기대를 반쯤 내려놓았는데, 이렇게 청명한 하늘이 열릴 줄이야. 재이가 “갓 리슨 투 아워 위시즈’'라고 말하자 다들 깔깔 웃었다. 무슨 말을 해도 웃음이 난다. 부처님이든 대자연이든 파란 하늘을 내어준 이라면 누구에게든 절하고 싶었다. 도마는 파란 하늘을 얻은 대신 강한 햇살과 무더위를 맛보게 될 거라고 했다.
오늘은 포브지카 계곡(Phobjika Valley)을 하이킹(Hiking)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초원 지대에서 강테 사원(Gangtey Gompa)까지 걸어가는 코스다. 도마는 더울 텐데 괜찮겠냐고 다시 한번 물었다. 도마가 가고 싶지 않은 건 아닐까? 도마는 말할 때 억양의 변화가 거의 없어서 말속의 생각을 알아채기가 어렵다. 딱 한번, 놀랐을 때 어머머머머!라고 말했지만 그것조차 높은음을 내지 않았다. 물론 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는 가야 했다. 우리는 이미 신이 나 있었으니까. 이렇게 좋은 날 걷지 않을 수는 없다.
도마는 차 트렁크를 열고 검은 비닐봉지에 생수를 주섬주섬 담아 넣고는 앞장서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빨리 가면 1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그럼 느림보인 나는 2시간쯤 걸리겠구나. 체력이 저질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천천히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빨리빨리'하는 것은 일상에서 겪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렇게 넓은 초원이 있을 수 있다니 진짠가 싶다. 무릉도원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는 데 그 마음이 이해가 된다. 나의 똥손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압도적인 비주얼이다. 사실 넓은 초원만 있으면 어딘가 허전할 법도 한데 곳곳에서 아주 많은 소와 말을 볼 수 있다.
보통 부탄에서는 소, 말, 개가 차량의 진로를 방해할 정도로 많이 돌아다닌다. 주인이 있긴 하지만 울타리 친 축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풀밭으로 몰고 가서 풀어놓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띈다. 그들은 자신의 삶, 즉 먹고 쉬고 걷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 차를 타고 다니면 진로를 방해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물론 아무도 화를 내지 않는다. 일단 우리를 인지하고 비켜주길 기다려본다. 안 되겠다 싶을 때는 남걀이나 도마가 취취-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 소리를 알아듣는지 힐끔 쳐다보고는 옆으로 비켜갔다.
시골에 무지한 도시인은 모든 게 신기해서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데, 아무리 센 레이저를 보내도 우리를 바라보지 않았다. 차라리 풀을 한 움큼 쥐고 있으면 올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가 그렇게 편안하게 땅바닥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지 꿈에도 몰랐다. 그림이나 영상에서도 늘 서 있는 모습뿐이었으니까. 나뭇 등걸에 머리나 몸을 비벼서 가려움을 해결하는 모습은 귀여울 지경이었다.
풀을 뜯는 소리는 더욱 충격적이었다. 어렸을 때 풀밭에서 뒹굴다가 야무지게 한 주먹 쥐고 잡아 뜯었을 때 들었던 소리가 났다. 다들 킁킁 대며 입맛에 맞는 풀을 골라서 힘차게 뜯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챱챱거리는 소리와 별 다를 게 없는데도 왜 그리 신기하던지.
마음대로 먹으니 싸는 것도 자유롭다. 걷는 모든 길이 화장실이 된다. 풀밭에 떨어진 것들은 비료가 되겠지. 여태까지 봤던 여느 소들과 달리 말랐다고 느낄 만큼 날씬했지만, 엄청난 양의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보냈다. 하이킹하는 이들에게는 터지지 않는 지뢰밭이다. 주변 풍경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결국 한 번은 즈려밟고 말았다. 도마는 깔깔 웃으며 그 대신 운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돌아가서 복권을 사겠다고 대답하면서 부탄에도 복권이 있냐고 물었더니 한 달에 한번 추첨한다고.
행복의 나라라는 타이틀은 걸었지만 어쨌든 돈은 중요하고, 누구나 마음 한편에는 일확천금을 얻어 편하게 사고 싶은 로망이 있겠지. 도마는 행운을 돈으로 사고 싶지 않다며 복권은 사본 적이 없다고 했다. 또 한 번 FM청년의 모습을 본다. 오늘도 도마를 알아가는 게 참으로 흥미롭다.
하이킹 코스는 완만한 길과 얕은 오르막이 반복된다. 풍경이 계속 바뀌기 때문에 지루하지 않다. 고산지대와 저질체력이 만나니 힘을 더 쓰긴 하지만 산책코스 정도의 기울기라 괜찮았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다고 했더니 멀리 높은 곳에 있는 건물을 가리키며 목적지(강테 사원)라고. 후반부에 경사가 급해질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축제가 열리는 날이니 구경도 할 수 있단다. 두 번의 축제라니 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이제는 축제에 대한 기대가 걸음에 실린다. 초원을 지나고, 땡볕을 지나고, 전나무길을 지나고, 파란 하늘과 예쁜 구름이라고 외치며 도마의 뒤를 쫓았다. 도마는 오늘도 이따금 가던 걸음을 멈추고 흘끔흘끔 뒤를 돌아보며 괜찮냐고, 물이 필요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처음 보는 신기한 꽃의 이름을 물었다. 모른다는 짧은 대답. 꽃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꽃이라고만 알고 있다고. 대신 국화(National Flower)인 히말라야의 푸른 양귀비꽃에 대해 알려주었다. 6-7,000미터에서 자라기 때문에 우리가 여행 중에 볼 확률은 제로다. 부탄 사람들도 쉽게 보지는 못했을 텐데, 누군가 목격한 파란빛이 너무 특별하고 신비해서 국화가 되었던 걸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요새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무궁화를 부탄의 거리에서 종종 볼 수 있었다. 부탄의 국화 대신 한국의 국화를 보는 게 어쩐지 웃프기도.
초원의 끝에서 시작된 작은 마을까지 건너고 나니 드디어 언덕길이다. 경사가 끔찍하게 급하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길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몇 발자국 걷지 않아도 숨이 찬다. 괜찮다고 해도 산소가 부족하긴 한가보다. 어쩐지 호텔에서 고작 1층을 계단으로 오르는 데도 우리 둘 다 헥헥대게 되더라니.
도마에게 사실 계단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곳의 소와 말이 나보다 훨씬 건강할 거라고 했더니 깔깔 웃는다. 충분히 천천히 가도 괜찮다고. 마음 같아서는 사뿐하게 올라가고 싶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한계까지 참아버리면 완전히 퍼질 수가 있어서 적당히 숨이 차오를 때마다 한 번씩 멈춰 섰다. 그러면서 주변도 한번 더 둘러보고 깊게 숨도 들이쉬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오늘의 구름은 너무나 재밌는 모양이다. 솜사탕도 있고, 나뭇잎사귀 모양도 있고, 파란 배경을 두고 꽤 다양하게 바뀐다.
평소에는 좀처럼 이렇게 길게, 여러 번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없으니까 일상을 벗어나면 작은 순간까지도 행복이 된다. 초록 들판과 언덕 너머에 걸린 하얀 구름을 따라 걷는 것, 비현실적으로 여기저기 널브러진 동물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 평소라면 진저리 칠 똥밭까지도 관대하게 품을 수 있는 것은 의무가 없는 시공간에서, 충분한 여유를 가졌기 때문이겠지. 누군가는 냉정하게 돈을 쓰는 입장이라서,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이제는 부탄의 여행 방식에도 익숙해졌고, 자유가 없어서 아쉽지만 그 대신 가이드 투어의 장점을 누리고 있다. 영어의 불편함은 어차피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금세 잊게 된다. 무엇보다 멋진 풍경은 모든 잡생각을 지울만큼 깊은 인상을 남기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