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시골 풍경

[Day 3-2] 로비사(Lobesa) + 포브지카(Phobjika)

by 시에

갑자기 창밖에 노랗게 물든 논이 나타났다. 도마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이 사진 찍기 좋은 곳에서 세워준다며 밥부터 먹자고 했다. 오늘의 여행자 식당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 있었다. 식당이라곤 이거 하나뿐인가 싶을 만큼 아담한 느낌. 물론 여행자들이 다니는 곳이라 별채의 화장실은 양변기로 정비되어 있었다. 사람이 적어 그런가 뷔페의 음식이 좀 식었지만 맛은 좋았다. 직원들도 도시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차림도 소박하고 말투나 표정도 옆집 사람 같다.


보통 식당에서 홍차나 커피는 무료로 주는데, 매번 잔을 가득 채워준다. 그리고 금세 주전자를 들고 돌아와 더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주는 대로 마셨다가는 물배가 차서 밥을 못 먹을 지경이다. 처음에는 거절하지 못해서 받아놓고 고생했는데, 삼일 만에 노 땡스가 입에 붙었다. 사실 나는 커피 중독자라 너무 많이 마시지 않으려고 시간을 정해 마신다. 여기 온 후로는 홍차가 너무 맛있어서 커피를 잊어버렸다. 평범한 티백일 텐데 기분 탓인지 너무 맛있었다.


한편, 부탄에서는 홍차에 버터를 타서 마신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는 버터티(Suja) 얘기를 듣지 못했다. 우유가 필요하냐고 묻는 정도였다. 심지어 가이드인 도마 조차 묻지 않았다. 느끼하지만 은근히 중독된다는 맛이 궁금했는데, 이대로면 영영 먹어보지 못할 것 같았다. 도마에게 말했더니 역시나 별일 아니라는 듯이 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한적한 카페로 데려갔다. 고생하는 도마와 남걀에게도 한 잔 사주고 싶었는데 칼같이 거절하는 쿨가이.


팥죽색의 버터티가 옛날에 먹던 쌀 뻥튀기와 비슷한 과자(dresi, 튀긴 달콤한 쌀)와 함께 나왔다. 과자는 차 위에 뿌려서 먹든 그냥 퍼 먹든 원하는 방법으로 먹으면 된단다. 버터를 타서 그런지 차 맛이 조금 느끼하긴 했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재이는 나보다 좀 더 느끼해한 듯. 그런데 오히려 맛보다 그 속의 버터가 모두 뱃살이 될 것 같다는 게 더 문제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다이어트의 굴레를 벗어던지지 못했구나.


도마는 카페 안에 있다가 잠깐 나와서 옆 테이블에 앉았다. 같이 앉기는 어색한가 보다. 몇 마디를 나누고서는 홀연히 카페 안으로 사라졌다가, 우리가 충분히 마셨다고 느낄 때쯤 스륵 하고 나타났다. 도마는 개와 고양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 같다. 오늘도 그를 알아가는 재미가 더해진다.



점심을 먹고 아까 이야기했던 곳으로 돌아왔다. 도마는 언제나 약속을 잘 지켰다. 허풍을 치거나 적당히 대답하지 않는 대신,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켰다. 귀 기울여준다는 것을 알았고, 며칠을 함께해서 그런지 부탁하기도 조금 수월해졌다. 산으로 둘러싸인 논이 아름다운 이 지역은 로비사(Lobesa)라고 했다. 추수할 때가 가까워졌음을 알려주는 황금물결. 목숨을 이어주는 소중한 쌀이다.



이제 다시 포브지카(Phobjika Valley)로 내달릴 시간이다.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더니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움이 더해진 비포장도로였지만 남걀 덕분에 무사히 도착했다. 포브지카는 해발 2,962m에 위치한 드넓은 계곡이자 초원이다. 2,227헥타르, 즉 670만 평이 넘는 크기라고 한다. 맑은 물이 흐르는 땅에서 자란 것들을 먹이 삼아 다양한 동식물이 살고 있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소와 말을 비롯하여 사슴, 멧돼지, 표범, 여우, 그리고 새 까지.


겨울에는 매우 추운 지역이라 11월 말이 되면 티베트에서 검은 목을 가진 두루미가 날아온다. 사람들이 따뜻한 동네로 피신하는 날씨에 와서 지내다가 추운 날이 끝나면 티베트로 돌아간다고. 아직은 철이 아니라 부상당해 미처 돌아가지 못한 두루미 한 마리만이 머물고 있었다.



처음에 여행사와 일정을 상의할 때 먼길이라며 권하지 않아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정했다. 도로에서 시간을 너무 쓰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셀프 칭찬을 해야겠다. 너무 잘했다! 내일의 포브지카 하이킹이 절로 기대가 된다. 내일은 날이 개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도마와 남걀은 웃음으로 대답했다. 부디 그러하기를. 사실상 지방 출장 중인 그들에게 빨리 퇴근하라고 등을 떠밀다가 깜박하고 내일 아침 약속을 정하지 못했다. 보통 9시 전후로 일정을 시작했으니 적당히 오지 않겠냐며 일단 밥부터 먹기로 했다.


초원을 바라보며 저녁을 먹고 있는데, 도마가 나타났다. 사복 차림의 그는 처음 본다. 약속을 정하지 않은 게 걱정이 되었는지 돌아왔단다. 우리가 몇 시에 저녁을 먹을지 몰라서 좀 기다린 모양이다. 방해될까 봐 호텔 측에 연락도 부탁하지 않았나 보다. 여기서 소심하고 세심한 면을 본다. 우리가 오히려 미안해졌다. 퇴근 후 다시 회사로 돌아간 것과 같지 않은가. 먼저 연락할 방법을 찾아볼 것을.


사실 기본 경비에는 3성급 호텔이 포함되어 있고, 원한다면 추가 비용을 내고 더 좋은 곳에서 머물 수 있다. 저렴한 모텔 정도일 거라 예상했기에 별 기대가 없었다. 특히 전망 같은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아름다운 풍경을 빼앗지 않다니! 처음부터 모두가 경치를 즐길 수 있도록 건물을 지은 모양이다. 가장 좋은 각도는 돈을 많이 쓴 사람에게 주겠지만, 충분히 감상할 수 있을 만큼 멋진 전망이었다. 되려 트립어드바이저의 사진이 실제보다 구리다는 생각이 들 정도. 넉넉한 마음씨에 행복이 추가로 적립되었다.



똥손으로는 압도적인 풍경을 담아낼 수 없을 거라고 중얼대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난로에 불을 붙여준단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장면이다. 산장 느낌을 내라고 갖다 놓은 난로인가? 아저씨의 재빠른 솜씨를 보고 있으니 군고구마가 생각난다.


그런데 우연히 테이블 위에 놓인, 무지막지하게 심지가 길고 큰 양초가 눈에 들어왔다. 전기가 나갈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얻자마자 정전이 됐다. 누군가는 식당에서 밥을 먹다 어둠을 맞이했겠군. 전기히터는 언제 쓸모가 없어질지 모른다. 방 밖에 수북이 쌓인 장작에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재이는 바깥에서 장작을 한 아름 가져다가 난로에 넣기 시작했다. 열기를 빌려 젖은 신발까지 말려보자. 그 후에도 다시 정전이 되었지만 이제 그쯤은 별로 대수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숯이 늘어가는 만큼 방이 후끈해졌다. 이쯤이면 오늘 밤 히터가 꺼져도 괜찮을 것 같다. 혹시 모르니 수면양말을 챙겨 신어야지. 갑자기 ‘난로에 불을 때면서 창문을 닫고 자도 괜찮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기구가 벽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몸통에서도 냄새가 좀 나던데. 창문을 활짝 열자니 불을 땐 게 무슨 소용이며, 산간에 어떤 놀라운 모양새의 벌레가 들이닥칠지 모른다며 오락가락. 결국 우리는 난로에 불이 다 꺼지기를 기다렸다가 자기로 했다. 덕분에 재밌고 따뜻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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