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1] 도츌라 패스(Dochula Pass)
부탄은 국제공항과 수도가 모두 서부에 있기 때문에 여행 코스도 서부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 동쪽으로 갈수록 도로 사정이 나빠져서 이동 시간이 길어진다. 우리나라에서 늘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사이즈의 산들이 무지개떡처럼 겹겹이 쌓여있기 때문이다. 단기 여행자의 경우에는 중부 지역을 일정에 넣기 어렵다. 일반적인 코스(Cultural Tour)를 여행하는 경우 팀부에서 차로 2~3시간 정도 걸리는 ‘푸나카(Punakha)’까지 다녀오는 편이다. 보통 4~5박 정도로 머무는 사람들에 비해 이틀 정도 여유가 있어서, 푸나카에서 서쪽으로 두 시간 정도 더 가 보기로 했다.
길 위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날이다. 도마와 남걀에게 컨디션이 괜찮냐고 물었다. 운전만 다섯 시간, 무엇보다 드라이버의 컨디션이 제일 중요하니까. 남걀은 괜찮다며 특유의 선한 미소를 지었다. 도마는 한국 노래를 좀 가져왔는 들어보겠냐고 물었다. 몇 년 전에 들어본 정통 발라드 곡이었다. 한국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가 있냐고 하니 그냥 다 좋단다. 기억이 안 나는 건지 말하기 싫은 건지 알 수가 없다.
액세서리나 신발, 전자기기 등을 보면 최신 유행을 좇는 사람인 것 같은데 사원에 가거나 공연을 볼 때는 다른 사람 같다. 사원에서는 부처님께 깍듯한 인사를 올리고, 전통공연을 볼 때 다른 가이드들은 뒤에서 노는데 혼자 정자세를 하고 지켜본다. 옛 것을 답답해하며 현대적인 것을 쫓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전통을 매우 귀히 여기는 모범생 청년 같다. 취미는 배드민턴에, 소년팀도 했다는데 이제는 성실한 생활체육인 같은 느낌도 난다. 쉴 때는 뭘 하냐고 물었더니 생각하기(Thinking)라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이제 외곽의 도로를 맛 볼 차례. 한쪽은 낭떠러지, 다른 한쪽은 돌떠러지(낙석위험)다. 언제든 돌을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간신히 아스팔트를 깔아놓은 도로의 일부분이 주저앉기도 했다. 안심하고 달릴만한 도로는 거의 없었다. 나름 계속해서 공사를 하고 있지만 장비에서 인력까지 소규모다. 게다가 산의 모양새나 기후를 고려해볼 때 시멘트로 다 발라버리는 식의 환경파괴적인 공사를 하지 않는 한 완전히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환경 정책상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지금처럼 공사가 계속되지 않을까.
구불대는 모양이나 비포장 상태의 덜컹거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기와 비교하면 우리나라에는 비포장 도로가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정도. 그나마 푸나카까지는 많이 정비된 편인데, 그 후로는 더 심해진다. 수도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서부인 지금도 이 상태인데, 동부로 가는 길은 어떻단 말인가? 100킬로를 18시간 운전해야 한다는 말이 이해가 된다.
게다가 부탄은 신호등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길이 좁을 때는 서로 배려해야 한다. 보수 중인 곳이 많아서 1차선 같은 2차선도 왕왕 있다. 눈치껏 적절히 양보하며 차례로 오고 간다. 이렇게 험한 길을 경차부터 거대한 버스까지 전부 다닌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장롱 면허만 있는 나는 그저 그들의 부처님이 우리를 보호해주기를, 아니 그보다 현실적으로 남걀의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남걀은 돌떠러지가 더 무서운 듯 낭떠러지로 바짝 붙어갔다. 재이는 낭떠러지가 더 무섭다는데, 나는 돌떠러지가 더 무섭다. 돌떠러지가 훨씬 더 예측 불가능한 것 같아서. 재이는 돌떠러지의 경우에는 큰 바위만 아니면 살아남을 확률이 높지 않냐고, 낭떠러지는 즉사일 테니 돌떠러지가 더 낫다고 했다. 사실 아무 의미 없는 대화일만큼 어느 쪽도 좋지 않지만.
남걀이 고생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창 밖은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었다. 우리가 아무리 빨빨거려봤자 한낱 먼지 같은 존재임을 되새겨주는 엄청난 바위. 미세먼지에 찌든 폐는 짙은 숲 냄새로 정화되는 것 같다. 크고 작은 폭포 또한 셀 수 없이 지나갔다. 이 땅이 물 부족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말이 와 닿을 만큼 흔한 장면이다. 물론 손대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도록 내버려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다. 오죽하면 우리나라에는 ‘멍 때리기 대회’라는 게 있을까. 이 나라는 욕심을 꾹 눌러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에 푸른 숲을 지킬 수 있었겠지.
다섯 시간을 내리 구불한 도로에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의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포인트가 적절히 있다. 팀부에서 동쪽으로 가는 도중에 히말라야를 볼 수 있는 도츌라 패스(Dochula Pass)를 지나간다. 다시 팀부로 돌아갈 때 또 들르게 되니 두 번의 기회가 있는 셈이다.
짧은 시간에 해발 3,000m 이상으로 급격하게 오르기 때문에 시시각각 기온이 낮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두 번 다 눈 덮인 히말라야 봉우리를 볼 수는 없었다. 대개 모든 날들이 흐리다고 했다. 날씨는 어차피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 별 수 없지만, 겹겹의 산과 구름모자, 길쭉하게 자란 나무를 바라보는 것만 해도 절경이었다. 주인공은 저 구름 어딘가에 숨어있겠지.
도출라패스에는 108 불탑(108 Chortens)과 드럭왕겔 사원(Druk Wangyal Lhakang)이 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날의 기억이 더 특별하게 남은 곳이다. 사원으로 오르는 계단의 분위기가 알 수 없는 세계로 가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색이 묘하게 섞인 돌계단 주위로 흩뿌려지듯 피어있는 꽃. 어느 드라마에서 봄직한, 사람이 죽은 후에 다음 생(生)으로 가는 계단과 비슷해 보였다. 불교에서 믿어 의심치 않는 윤회(輪廻)의 한 장면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사원에서는 붉은 천을 두른 승려가 성수(Holy Water)를 손에 부어준다. 도마를 유심히 보고 따라 하기로 했다. 손을 겹쳐서 둥글게 모은 후에 물을 받아마신다. 주전자의 재질 때문인지, 부탄의 물에 철분이 많아서인지, 노란빛의 물에서는 쇠맛이 났다. 부탄에서 생수만 먹은 터라 일상의 물과 비교를 할 수가 없네. 여행자는 익숙하지 않은 철분 때문에 배탈이 날 수 있어서 생수를 주기 때문이다.
다시 동쪽으로 출발이다. 도마에게 우리가 갖고 있는 철 지난 가요를 들어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요새는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듣다 보니 MP3는 아주 오래전 것밖에 없네. 좋다 하여 틀었는데 콩글리시로 곡을 설명하는 게 너무 어려웠다. 평소에 K-Pop 가사는 어떻게 이해하냐고 했더니 영어로 번역해서 본다고. 좋아하는 곡이나 장르를 알려주면 비슷한 것들을 찾아주고 싶은 오지랖이 뻗쳤는데, 굳이 답하지 않는 것을 캐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그만 두기로 했다.
한참을 틀어놓고 가다 보니 어쩐지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운전하는 남걀에게는 부탄 노래가 제격이 아닌가. 우리도 읊조리는 듯한 부탄 노래가 더 듣고 싶어 지기도 했고. 이 나라의 자연에게는 여기서 만들어진 노래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물론 길이 험해서 그런지 오늘만은 아무도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