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1] 팀부 축제 (팀부 테츄, Thimphu Tsechu)
둘째날이다. 아침에 거울 속에서 호빵을 발견했다. 힘든 여정도 아니었는데 얼굴이 퉁퉁 부었다. 고산지대라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건가? 그래도 두통은 없으니 이 정도면 성공적이다. 게다가 오늘은 축제 구경을 간다니 호빵이라 해도 기분이 좋다. 도마는 서로 제안했던 시간 사이 어디쯤, 어중간한 시점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는 정말 늦게 오고 싶었던 걸까? 땡보인가 하는 물음표가 떠오르지만, 예정에 없는 곳에 가자고 말하면 또 흔쾌히 데려가는 예스맨이다. 수수께끼의 행복을 찾는 여행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가이드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이번 여행은 의외의 방향으로 흥미진진해질 것 같다.
부탄에서는 매년 전국에서 다양한 축제가 열리는데, 4월의 파로 축제와 10월의 팀부 축제(Thimphu Tsechu)의 규모가 가장 크다. 팀부 축제는 팀부의 행정과 종교를 관할하는 타쉬쵸죵(Tashi Chhoe Dzong)에서 열린다. 타쉬쵸죵은 ‘찬란하게 빛나는 성전’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13세기에 건립되었으나 18세기에 발생한 대지진과 화재로 큰 손상을 입었다. 지금의 건물은 20세기 초반에 재건된 것으로 여전히 복원 중이다.
축제가 시작되면 불교를 최초로 전한 파드마삼바바에 얽힌 이야기를 무용 등의 공연으로 볼 수 있다. 팀부 주민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 사람들과 관광객이 모두 몰려와서 부탄 답지 않게 사람이 북적거린다고. 오전 10시가 좀 넘은 시간에 근처에 도착했는데, 이미 죵내에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제법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고 샛길을 돌아 내려가니 긴 줄이 있었다.
오늘은 수많은 색이 모여 빛난다. 사람들은 채도가 높고 색이 화려한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머리나 신발, 장신구에도 힘을 주었다. 도마와 남걀도 어제와는 대조적인 차림이다. 도마는 전통적인 스타일을 살린 구두를 신었다. 멋지다고 했더니 원래 축제에 갈 때는 화려하게 입는다고. 전통 의상을 챙겨 입은 관광객도 제법 많았다.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등산화를 신은 것을 보면 분명 관광객인데, 눈에 띄게 다채로운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도마와 남걀은 길게 늘어선 입장 줄을 지나쳐서 보안검색대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꼼수에 능한 요령꾼처럼 보였다. 반칙인가 싶었는데 관광객에게는 배려를 해주는 것 같았다. 안쪽에도 관광객이 앉을 수 있는 구역이 따로 있다. 입장 후에도 둘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관광객 전용 구역에는 모두 들어가지 못한다고. 잠시 후에는 도마 또한 보안 대원의 지시로 우리 곁을 떠나야 했다. 관광객이 많아서 그의 자리마저 내줘야 했단다.
뜻밖의 자유가 생겼네? 물론 어디선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가 필요한 순간에 나타나겠지만. 도마는 다른 가이드처럼 햇빛을 피할 목적으로 우산을 챙겨 오거나, 엉덩이 보호를 위해 방석을 들고 오는 섬세함은 없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니 호불호가 있겠지만, 어쩐지 나는 조금은 무심한 모습이 되려 좋았다. 잘해주는 건 좋은 데, 뭐랄까 시중을 들어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원치 않았으니까.
축제 현장은 지상의 열기와 사람들의 흥분이 뒤섞여 더욱 뜨거워지고, 여러 가지 공연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정적인 리듬에 맞춰 아주 잔잔하게 춤을 추기도 하고, 격하게 몸을 움직이며 뛰기도 했다. 탈춤(Mask Dance)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대포 카메라도 함께 떠올랐다.
노래와 동작에 담긴 의미는 이해할 수 없으니 보이는 모습에 집중하게 되는데, 같은 동양문화권이라 그런지 겉보기에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도깨비 탈이나 춤 동작, 무대의상은 우리의 것과 아주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중에 여행사 직원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일이 있었는데, 한국의 전통 공연과 닮았다고 했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한류 때문에 우리 문화를 접했다 해도 그건 몰랐나 보다.
‘아차라(Atsara)’라는 캐릭터도 주목을 받았다. 관중들에게 사례를 받고 복을 나눠주는데, 장난을 치거나 우스꽝스러운 동작을 하며 관심을 끈다. 관중석으로 들어가 함께 사진을 찍어줄 정도로 서비스 정신이 훌륭하다. 중간중간 남근 조형물을 가지고 나와서 다른 이들과 함께 연기도 한다. 원래 부탄에는 남근에 대한 숭배가 있어서 여기저기 많이 걸어놨다는데, 요즘은 시골이 아니면 자주 보이지 않는다고.
관객석의 분위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스페인어 글귀 중에 ‘축제 속에 산다(Vivir la fiesta)’란 말이 있는데, 딱 그 문구 같았다고나 할까. “삶은 축제가 아니지만, 때때로 축제의 기회가 있어야 삶이 삶다워진다. 그런 기회를 통해 자신을 잊고 삶을 잊는다. 그리고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축제를 기다리며 설레던 시간은 옷차림과 짐꾸러미에 담겨있었다. 멋진 옷을 고르고, 도시락을 싸고, 돗자리와 담요까지 챙겨서 소풍을 나온 분위기였다. 축제가 오전부터 오후 4-5시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긴 시간을 죵내에 머무는데, 공연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눠먹고,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누며 보내는 것이다. 모임의 형태도 다양하다. 제법 큰 아이들과 함께 나온 가족 외에도, 어린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부부나 높은 하이힐에 예쁜 가방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온 이들도 있다. 모두들 특별한 오늘을 기념하며 셀카를 찍는다.
도마에게 사람들이 소풍을 나온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더니 그렇단다. 우리가 뮤직 페스티벌에 도시락과 돗자리를 챙겨서 나가는 것과 비슷하려나. 부처님의 이야기를 듣는 공연도 중요하겠지만, 그저 일탈이라는 것만으로도 즐거울 테니까. 여행이 내게는 일탈인 것처럼, 그들도 일상을 벗어나 여기에 있다. 세상 어느 곳이든 휴일을 즐기는 얼굴은 모두 다 행복하다. 축제 속에서 또 하나의 소소한 행복을 본다.
한편, 팀부 축제가 열리는 주말에는 타쉬쵸죵 인근의 대로에서 큰 시장이 열린다. 소풍에 쇼핑까지, 말 그대로 즐거운 휴일이다. 파란 천막이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고 상점마다 사람들이 북적거린다.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이라 그런지 패딩 점퍼와 같은 옷가지도 많고, 생활용품과 장난감, 심지어 한국을 초토화시킨 디즈니 캐릭터 ‘엘사’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간만의 쇼핑에 들뜬 표정이나, 경쟁자를 물리치고 득템 하고자 하는 치열한 눈빛은 한국이나 부탄이나 다를 것 없었다. 수공예 기념품과 자석을 집어 든 재이와 나도 신이 난다.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탐나는 주머니나 지갑, 팔찌, 인형 같은 것들을 만지작 거리며 여행자로서의 작은 행복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