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방문

[Day 1-2] 파로 린풍 죵(Paro Rinpung Dzong)

by 시에

파로(Paro)는 해발 2,200m에 위치한 도시로, 고도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닌데도 머리가 살짝 띵하다. 지나가는 차들이 뀌는 검은 방귀 때문인지, 수면부족 때문인지, 정말 산소 때문인지 모르겠다. 대중적인 투어(Cultural Tour)를 하는 여행자의 경우 고산병을 앓는 일이 거의 없다지만, 원래 고산병이라는 것이 종잡을 수 없다고 했다. 혹시나 남은 일정을 망치게 될까 봐 불안했다. 감기로 며칠을 고생하고 온터라 더욱 조심해야겠다는 마음에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그 맛있다는 부탄 맥주도 꾹 참아야지. 마지막 날 밤에 잔뜩 마셔주리라.



창 밖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는 데, 도마의 목소리가 침묵을 깨고 불쑥 떠올랐다. 창 밖에 보이는 큰 건물이 파로 린풍 죵(Paro Rinpung Dzong)이라고 했다. 줄여서 파로죵으로 부른다고. 죵(Dzong)은 성이나 요새를 의미하는데, 정치와 종교 목적으로 공간을 분리하여 사용한다. 종교를 목적으로 하는 사원(Temple)을 곰파(Gompa) 또는 라캉(Lhakhang)으로 이해하면 이름에서 건물의 용도를 추측하기 쉽다.



도마는 희고 커다란 스카프(카네, Kabney)를 집어 들더니 자신의 몸에 둘렀다. 쌀쌀한 날씨에 사용하는 숄이나 머플러와 비슷하게 생겼다. 죵이나 사원에 들어갈 때 의무적으로 해야 한단다. 전통을 보존하기 위한 규정이다. 남성은 넓은 스카프 형태의 카네(Kabney)를, 여성은 긴 띠 형태의 라츄(Rachu)를 두른다. 남성의 경우 지위에 따라 색이 지정되어 있는데, 왕은 노랑, 총리는 오렌지, 보통 사람은 흰색을 사용한다.


도마가 입고 있는 전통 의상은 학생의 교복이자 국가기관 및 관광업 종사자의 제복이다. 여자의 옷은‘키라(Kira)’, 남자의 옷은 ‘고(Gho)’라고 한다.‘키라’는 재킷(Tego)과 치마로 구성된 투피스로 한복과 비슷한 구조다. 재킷은 저고리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길이가 허리선까지 내려온다. 치마는 발목까지 오는 H라인의 랩스커트다.


한편, 남자가 입는 ‘고’는 일종의 원피스다. 한복 두루마기와 비슷한데 길이가 발목까지 오고 매우 펑퍼짐하다. 허리에 벨트(Kera)를 매서 모양을 잡아 입는다. 상체에는 움직이기 편한 공간이 생기고, 전체 길이가 무릎 선까지 올라가서 보행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 별도의 바지는 입지 않고, 무릎 바로 아래까지 오는 까만 반스타킹을 신는다. 원래는 롱부츠를 신었는데, 요즘은 편의를 위해 스타킹을 신고 신발은 자유롭게 신는다. 도마는 일정의 난이도에 따라 전통 스타일의 구두, 스니커즈, 로퍼 등으로 갈아신곤 했다.



채비를 마치고 죵내로 들어섰다. 파로 린풍 죵(Paro Rinpung Dzong)은 부탄 불교의 시조인 파드마삼바바의 사원 양식을 토대로 지은 건물로, 방어와 거주의 구조를 잘 갖추고 있다. 티베트의 침공이나 강진에도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을 만큼 튼튼하게 지어졌다. 키아누리브스가 출연한 ‘리틀 부다(Little Buddha)'라는 영화의 주 무대이기도 하다. 옆으로 파로강이 흐르고, 강가에는 오래된 나무다리가 놓여있다.



흐린 날씨 때문인지, 처음 방문해서 그런지, 고요하면서도 묵직한 분위기에 압도되었다. 도마는 처마나 지붕의 장식, 구조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우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두리번거린다. 그는 아직 우리의 취향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잘 따라오는지, 설명에 만족하는지 수시로 곁눈질했다. 가끔은 말도 없이 한 곳에서 오래도록 서 있었으니까, 그는 자주 돌아봐야 했다.


자유여행에 익숙해서 일까, 타인이 계속해서 내게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게 거슬렸다. 뭔가 빨리 쫓아가야만 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물론 도마는 여기서 좀 더 머물러도 되는지 물어볼 때마다 쿨하게 니 맘대로 하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래도 아직은 관계부터 언어까지 모두 조심스럽다.



건물 내부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다. 대개 죵과 사원에서는 허가 없이 내부를 촬영할 수 없다. 대략적으로 묘사하면 나무와 향이 섞인 냄새가 나고, 벽면에는 우리나라의 불화와는 화풍이 조금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양한 불상과 장식, 국가와 종교에 기여한 인물의 흉상, 각종 공양품도 볼 수 있다. 더불어 지위가 가장 높은 승려와 국왕의 사진이 걸려있었다.

건물 외부의 탱화와 장식



도마는 불상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고, 공양을 한 후에 나직한 목소리로 내부를 설명해주었다. 덩달아 우리도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르듯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그중 네 명의 친구(The Four Harmonious Friends)에 대한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요약하면 코끼리, 원숭이, 토끼, 새가 모여서 나무의 주인을 가리는 과정에서 각기 다른 연령대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서로 싸우지 않고 힘을 모아 열매를 따 먹었다는 이야기다. 요샛말로 ‘리스펙트(Respect)’에 대한 이야기랄까. 각각의 동물은 다양한 세대를 상징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화합하면 모두 행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준다.



파로죵은 또 하나의 훌륭한 전망대이기도 하다. 고요한 죵내에서 바깥으로 시선을 돌리면 파로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점점 노랗게 변해가는 벼이삭을 바라보면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건 왜일까.



파로죵을 벗어나 천천히 걷다가 몇 군데를 더 둘러보고 수도인 팀부(Thimphu)로 출발했다. 창 밖의 풍경을 구경하며 달릴 생각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 꺾였다. 졸다 깨다 한 시간 남짓 달리니 호텔 앞이다. 전통 의상을 입은 여성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한 명이 다가와 우리의 커다란 캐리어 두 개를 양손에 들고 걷는다. 20인치가 넘는데 혼자서 다 나르는 건가? 주변에서 아무도 돕지 않는 게 의아했다.


우리가 들겠다고 했더니 딱 잘라 거절한다. 오히려 틈을 주지 않고 더욱 빠른 속도로 가버렸다. 처음엔 이게 뭔가 했는데 일하는 방식이 그랬다.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하는 것. 감당할 수 없는 경우에만 다른 사람이 돕는다. 그녀는 어느새 계단을 쏜살같이 일을 마치고 무리로 돌아가 까르르 웃고 있었다.


며칠 지내보니 다들 바쁘지 않을 때는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는데, 거기서 나는 또 한 번 작은 행복을 보았다. 쉬는 모습을 고객에게 보이지 말라는 우리와 비교된다. 마네킹처럼 지정된 자리에 서서 입을 꾹 다물고 대기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이곳 사람들은 할 일이 있을 때는 무리에서 빠져나온다. 일을 마치고 여유가 생기면 다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쓸데없이 경직되지 않은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어차피 일이야 어디든 고되다고, 사람이 좋으면 견딜만하지 않다고 하던가. 짬짬이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모습에서 생기 넘치는 꽃밭이 연상되었다.


도마는 메뉴판을 건네주면서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쉬면 된다고 말했다. 도마의 추천으로 부탄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고, 내일 언제 만날 지 약속 시간을 잡았다. 아, 그렇구나. 자유가 없는 여행에는 약속이 필요했다. 그가 생각보다 늦은 시간을 이야기했을 때, 읭? 대충 일하려는 건가?라는 의심이 들었다. 월급루팡처럼 보였다고 하는 게 맞겠다.


적당히 중간 지점에서 타협을 했다. 그는 좋은 지 싫은 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떠났다. 별다른 부연설명이 없어서 적절했는지 판단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려워서 반대 의견을 못 낸 걸까? 아직은 그의 성격을 잘 모르니까 난감하다. 조금은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부탄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도마와 좀 더 친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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