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길을 걷다

[Day 5-1] 푸나카 남걀 불탑(Namgyal Chorten)

by 시에

푸나카(Punakha)는 해발 1,300m까지 내려갈 정도로 부탄 내에서는 고도가 낮은 편이다. 두 개의 강이 지나며 다른 지역에 비해 따뜻하다. 덕분에 이모작이 가능하고, 바나나와 같은 과일도 잘 자란다. 샤브드룽이 부탄을 통일한 후에 250년간 수도로 삼았을 정도로 풍요로운 땅이다.



오늘은 아름다운 논을 가로지르고 숲을 지나 전망을 볼 수 있는 불탑까지 하이킹을 한다. 추수를 앞두고 색이 조금씩 변해가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 그 사이로 걷는 것, 모두 너무 오랜만이다. 일정이 뒤로 갈수록 점점 격해지는 건가? 달덩이처럼 부푼 얼굴은 그대로지만 몸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재이는 아직 살짝 머리가 띵하다고 했다. 그래도 둘 다 큰 탈이 없어 다행이다. 푸나카는 원래 따뜻한 지역이니 어제보다 더 덥고 힘들겠지? 도마는 어제와 다르게 괜찮겠냐는 질문 없이 바로 앞장섰다. 물론 오늘도 생수를 담은 까만 비닐봉지를 달랑달랑 들고서.



사실 이 주변지역은 과거 부탄 귀족들이 살던 마을이라고 한다. 따뜻한 데다 먹을 것이 잘 자랐으니 부자들이 먼저 알아봤겠지. 삼십 분 남짓 걸었다. 들판을 지나고 소나무길도 통과했다. 완만한 오르막길을 조금 더 오르면 캄숨 율리 남걀 초르텐(Khamsum Yuelley Namgyal Chorten)에 도착한다. 초르텐(Chorten)은 불탑을 뜻하는 말이다. 8년을 지어 건물을 완성하고 3일 동안 법회를 열었다고.



실컷 구경까지 잘 하고 나서 지붕을 찍겠다고 뒷걸음치다가 하수구에 발이 빠졌다. 알 수 없는 오물을 밟은 후에 잔디밭으로 넘어졌다. 덩달아 무릎도 까졌다. 뭔가 소똥에 오물에 신선하기는 하지만 부끄러움도 아픔도 나의 몫이다. 그래도 햇볕을 잔뜩 받고 잘 자란 잔디 덕분에 손목과 엉덩이는 안전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면 엉덩방아를 찧은 자리에 소똥이 없었던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인가.


넘어진 덕분에 뒤를 돌아보니 바깥쪽 담 위에는 작은 불탑이 늘어서 있다. 어떤 불탑은 안쪽이 뚫려있어서 불을 피워 연기를 신에게 보내기도 한다. 가끔 길가의 돌떠러지에서도 삼각뿔 모양의 조그마한 돌을 보게 되는데, 그것 또한 불탑이라고 했다. 눈에 잘 띄게 흰색이나 노란색으로 색칠한 것도 있다. 우리가 소원을 담아 돌을 탑처럼 쌓는 것과 비슷하다.

▲ 삼각뿔 모양의 아주 작은 불탑


도마는 불화에 담긴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좁고 가파른 계단 앞으로 데려갔다. 둘이 지나갈 간격이 못되다 보니 내려가는 사람과 올라가는 사람 사이에 배려가 필요하다. 만족한 발걸음과 기대에 찬 발걸음 사이로 여유로운 미소가 오간다. 기대에 부푼 우리도 전에 없이 너그러운 마음이 생겼다. 조용한 실내에서 수십 번의 땡큐와 유어 웰컴이 반복된 까닭이다.


꼭대기에 오르니 아까 지나왔던 길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땡볕을 온몸으로 맞으며 걸었던 논길, 미처 보지 못한 구불구불한 강줄기, 반짝이는 물빛, 든든하게 놓인 높은 산까지. 엄청난 풍경이자 소중한 자연이다. 태양은 세상의 빛깔을 더욱 화려하게 살리는 것으로 오늘 흘린 땀을 보상해주었다.



죵이나 사원에 가면 반드시 세워져 있는 높고 긴 깃발(라다, Lhadhar)도 어김없이 바람에 펄럭였다. 깃봉은 지혜/지식(Wisdom)을, 깃대는 공감/연민(Compassion)을, 바닥의 둥글넓적한 지지대는 힘(Power)을 상징한다고 했다. 도마에게 다 기억하고 있다고 뽐내듯 말했더니 깔깔 웃는다. 재이가 ‘타쉬쵸죵’을 외우는 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자 자기 이름은 기억하냐고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재이는 잠깐 멈칫하더니 사람 이름은 잘 외운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정답을 맞혔다. 심지어 이번에는 단호한 결의로 여행과 관련된 모든 이름을 외워버렸다.



오늘도 걸어왔던 길을 되돌아간다. 논길에 할아버지 한 분이 보따리를 놓고 앉아 계셨다. 아까 뵈었는데 아직도 계시네. 햇볕이 강한 날인데 그늘도 없는 자리에서 오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신다.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데, 도마가 다가가더니 할아버지께 말을 건넸다. 잠시 후, 할아버지는 보따리 속의 물건을 꺼내서 도마의 까만 봉다리에 부으셨다. 초록빛의 작고 둥근 과일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 직접 키운 구아바를 팔려고 나오셨나 보다. 도마는 우리에게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행운을 돈으로 사지 않는 도마는, 꼭 필요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과일을 산다.


도마는 트렁크에서 칼을 꺼내더니 구아바를 슥슥 깎아서 건네주었다. 울퉁불퉁한 겉모습과는 반대로 아주 달콤했다. 따뜻한 동네라더니 과일이 정말 잘 자라나 보다. 바나나와 구아바는 꽤 흔한 듯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부는 기후가 달라서 심지어 열대우림도 있다고. 다만 어떤 과일이든 크기가 작고 표면이 매끄럽지 않으며 빛깔도 선명하지 않다. 정책적으로 인위적인 노력은 안 한다더니 생긴 그대로 소비하나 보다. 물론 여행 내내 부탄에서 먹은 과일은 겉보기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맛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고 여겼는데, 구아바 덕분에 도마와의 만남이 더 큰 행복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도 가끔씩 그 따뜻한 마음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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