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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Mar 16. 2018

봄바람

부산 동백섬 '동백꽃'

이제는 겨울이 끝난 듯 하지만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출근길에는 두툼한 외투가 그리워진다. 한편 짧게나마 햇살을 맛보는 점심시간에는 가벼운 겉옷을 꺼내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무척 추웠던 지난겨울을 생각하면 올봄이 얼마나 짧을지 벌써부터 조바심이 들지만, 그래도 다시 봄이다. 꽃이 피기 시작했다.



겨울과 봄 사이, 애매한 마음이 들 때쯤 갈매빛 이파리 사이에서 붉은 꽃을 볼 수 있다. 동백나무는 달콤한 향기를 포기한 대신 겉모습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아담한 꽃송이는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새빨갛고, 둥근 잎사귀는 일 년 내내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흐른다. 가끔 하늘이 변덕을 부려 뒤늦게 눈이 내리면 하얀 눈꽃 사이에서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도 한다.



부산의 아침 바람에도 어중간한 계절이 담겨있었다. 남쪽 지방은 따뜻할 거라 상상했는데 얇게 차려입은 옷이 무색할 만큼 서늘한 바람이 옷섶을 파고든다. 그래도 해운대 앞바다는 봄빛이다. 미세먼지가 주춤한 틈을 타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근처의 동백섬 입구에는 오가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운동복 차림의 주민은 뒷동산을 대하듯 무심한 얼굴로 섬을 둘러 달리고, 부지런한 외지인은 여유롭게 산책을 즐긴다.



동백섬은 원래 이름 그대로 ‘섬’이었지만 인근에서 떠내려온 것들이 서서히 쌓여 육지와 닿았다. 바다를 건널 필요가 없어진 섬은 해안선에서 삐죽 튀어나온 모양새를 하고 있다. 안쪽에는 신라시대 학자가 남긴 석각이나 전설을 담은 동상, 국제회의장 등 과거와 현재의 흔적이 두루 섞여 있다. 물론 '동백'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해마다 곳곳의 동백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힌다.



정상으로 이어진 산책로에는 양 옆으로 동백나무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크고 작은 나무가 골고루 섞여 저마다 다른 시간을 산다. 운 좋게 아침 햇살을 한껏 받은 꽃송이에 제일 먼저 시선이 멈췄다. 일부는 이제 막 꽃봉오리를 맺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 한편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는 벌써 한 차례 꽃이 지나간 듯했다. 통통하게 잘 자란 새들까지 주위를 맴돌며 푸드덕 거리는 아침 풍경.



종종 나무 주변으로 붉은 점이 찍혀있다. 사방으로 하나둘씩 꽃송이가 놓여 누군가 일부러 두고 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얗게 피어나 갈변하며 꽃잎을 떨구는 목련과 달리 송이채로 해를 마감하는 동백꽃. 보통 바람이 제법 따스해질 때쯤이면 다른 꽃에게 인기를 넘겨주고 붉은빛을 감춘다. 우리가 화사한 봄날에 정신이 팔린 사이에 스르륵 끝을 맺곤 했다. 우수수 떨어진 꽃송이의 기억은 색색의 다른 꽃에 밀려 빠르게 잊힌다.



확실히 동백꽃에는 남다른 정서가 있는 것 같다. 홑겹으로 피는 작은 꽃송이가 은은하게 마음을 울린린다. 한해 전에 누렇게 변해버린 들풀이 쓸쓸하게 휘날리는 데도 묵묵히 꽃망울을 터트리는 모습은 늘 인상적이었다. 땅에 툭 떨어진 꽃송이가 누군가의 목숨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때가 되면 다시 핀다는 사실이 위로가 된다. 슬그머니 봄바람을 불어주는 듯한 느낌이다. 괜찮다고, 다시 좋은 날이 온다고 토닥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다른 봄꽃과 달리 아픔과 희망을 함께 품은, 아주 특별한 꽃으로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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