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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Feb 11. 2018

밤걸음

일본 오타루

홋카이도는 러시아와 가까운 북쪽 지역에 있어 겨울철에는 오후 4시면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쨍하게 빛나는 흰 눈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드는 한편 야경을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진다. 덕분에 삿포로에서 기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오타루의 야경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다. 오타루에서는 운하의 조명이 빛을 발하기 시작할 무렵이면 오후 내내 북적이던 상점가가 빠르게 고요해진다. 이방인의 관심을 끌었던 요란한 광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오래된 건물 특유의 고즈넉한 정취가 살아난다.



어둠이 발끝을 내밀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힘들다는 일몰 언저리.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색의 파랑이 지나간다. 밤기차를 타고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살짝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명물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을 여러 번 사 먹어도 괜찮을 만큼 충분히 여유 있다며, 이른 시간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홋카이도의 밤은 무척 길고, 아직 우리는 막차 시각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마지막 남은 파랑을 붙잡은 교차로는 운하만큼 상징적인 오르골 상점을 드나드는 사람들로 붐볐다. 맞은 편의 유럽풍 건물에는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고 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낮과 밤이 바뀌고 두 해가 오가는 길목에 있음을 대놓고 알려준다. 빛망울이 둥글게 부풀어 올라 사람의 시야를, 이내 마음을, 마침내 온 세상을 뭉그러뜨릴 것만 같은 풍경.



온종일 변덕을 부리던 눈발이 제법 굵어졌다. 눈송이가 또렷하게 보이는 함박눈이다. 덩치는 큼지막해도 세상 가벼운 녀석들이 기척도 없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미 눈이 수북이 쌓인 지붕 위에도, 도로변에 밀어놓은 눈더미 위에도 한 겹을 더한다. 상점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골목을 누비던 이들은 허기를 채우러 사라지거나 운하로 향했다. 앞서 모든 것을 눈에 담고 플랫폼에 서 있는 이들도 있겠지.



눈이 금방 잦아들 것 같지 않아 처마 아래 잠시 멈춰 섰다. 선물로 산 과자 상자가 젖지 않도록 비닐봉지의 매듭을 당기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무심하게 툭툭 떨어지는 눈. 인적이 뜸한, 오래된 골목길에서 날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것이 이렇게 고요하고 아늑한 일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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