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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에 Jan 15. 2018

은은한 위로

일본 오타루 텐구산(天狗山) 전망대

올해는 작년보다 자주 눈이 내린다. 사무실에서 눈 덮인 주택가를 내려다보는 게 벌써 몇 번째인가. 창문에 바짝 붙어 감탄사를 내뱉던 동료도 이제는 시큰둥한 표정이다. 나 역시 미끄러운 눈길 생각이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인다. 여행지나 영화 속의 눈부신 이미지가 폭설의 뒤끝을 잊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홋카이도(北海道)는 설국(雪國)으로 불린다. 자신 있게 눈축제를 벌일 만큼 눈과 함께 한해를 마감하고 시작하는 곳이다. 중심도시인 삿포로(札幌)에서 가까운 오타루(小樽)는 오래된 건물이 늘어선 아담한 상점가와 소박한 운하, 유리공예품 및 오르골로 유명하다. 특히 우리에게는 1999년 말에 개봉한 일본 영화 ‘러브 레터(Love Letter)’ 때문에 서정적인 눈의 도시로 각인되어 있다.



기차가 눈 쌓인 들판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눈에 둘러싸인 단층집이 드문드문 스쳐간다. 바닷가 기찻길에 들어서자 시선이 창밖으로 쏠렸다. 철로 주변에 높게 쌓인 눈 때문에 육지와 바다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 눈 너머로 바닷물이 출렁이는 기묘한 풍경이다. 눈을 향해 계속해서 밀려드는 거친 파도가 기차를 덮칠 것 같았다. 잿빛 하늘이 스산한 분위기를 돋우는 오늘, 나만 마음이 울렁이는 것인지 다른 이들은 그저 평온해 보인다.



오타루 역 뒤쪽의 작은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종점인 텐구야마 로프웨이(Tenguyama Ropeway)까지 이십 분 남짓, 다시 한번 창 밖으로 눈길을 돌린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눈 무더기가 커지고 인적이 줄어들어 고요하다. 버스는 주택이 늘어선 마을길을 휘휘 돌아나갔다. 이따금 누군가 정류장 표지판 옆에 쌓인 눈더미를 피해 버스로 다가왔다. 목적지에 내린 사람은 좁은 길을 능숙하게 지나간다. 영화를 보면서 상상했던 정취에 가까웠다. 장바구니를 들고 오가는 사람들, 조용한 골목길, 과하게 꾸미지 않은 상점, 집집마다 비슷한 듯 다르게 치워둔 눈 뭉텅이, 눈을 모자처럼 눌러쓴 나무 같은 것.


버스는  승객을 하나둘씩 덜어 내며 오르막길로 향했다. 시내에서 제법 떨어진 언덕마을은 외진 곳에 살았던 영화 주인공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학교 운동장은 눈으로 가득 차 있다. 기사님은 마지막을 예고하듯 속력을 높이더니 산으로 곧장 이어진 경사로를 한달음에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바다와 도시를 한눈에 아울러 볼 수 있다는 텐구산이 온통 하얗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바닷가 마을은 어떤 모습일까.  



텐구산은 홋카이도의 여느 산처럼 스키장이 되기도 한다. 덕분에 텐구야마 로프웨이는 스키 장비를 부둥켜안은 이들과 카메라를 챙겨 든 관광객까지 모두 싣고 하루 종일 산을 오르내린다. 오늘도 이제 막 레슨을 받는 꼬꼬마 친구부터 섬 밖에서 날아온 여행자까지 눈 위를 구르고 있었다.



가랑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굵은 눈발이 얼굴로 날아들었다. 빠르게 흐르는 구름을 따라 눈송이가 모습을 바꾸는 무채색 세상이다. 눈 덮인 지붕과 눈 구름이 넘실대는 바다를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다. 손이 시리고 볼이 얼얼해도 좀처럼 떠날 수 없었다. 빨간 지붕이 늘어선 바닷가 마을을 난생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언제나 처음은 강렬하고 여운이 길다.



구름 저편으로 스멀스멀 파란빛이 번지자 주변의 색이 조금씩 드러난다. 눈 오는 날 특유의 가라앉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바래고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물론 시시각각 변하는 날씨를 생각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이 몰려올 것임을 알고 있다. 낯선 땅은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분위기를 바꾸며 여행자의 마음을 흔들었다. 유난히 춥고 눈이 잦은 올 겨울, 영화 위에 덧칠된 설국 풍경이 은은한 위로가 되어주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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