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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어른일기 Jul 21. 2022

물 흐르듯이 살게요

두 달만이다. 정수기 필터를 통해 신선한 물이 정수되는 것이. 원래는 4주에 한 번 교체 해야 한다. 그 시기를 놓치고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다. 며칠 전 주문한 필터가 이제야 도착했다. 물통을 세척하고 물을 담았다. 필터를 물속에 넣고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필터에서 뽀글거리는 기포가 나왔다. 기포가 더 이상 나오지 않자 물을 버렸다. 정수기 필터를 장착하고 물을 담았다. 정수된 물은 바로 마실 수 없다. 필터를 장착하고 정수된 두 번의 물은 버려야 한다. 그 후 정수된 물부터 마실 수 있다. 정수기 뚜껑에 내장된 필터 교체 주기가 0%에서 100%로 올라갔다. 한 달가량을 원효대사 해골 물이라 생각하고 필터의 수명이 다한 물을 마셨다. 수돗물은 원래 깨끗하니까 괜찮다고 여겼다. 뭐 상관없지 않나? 교체 후 물맛은 나쁘지 않았다. 사용한 필터는 모았다가 재활용 신청을 하면 된다. 현재 수명을 다한 필터는 3개다. 6개가 되어야 수거 신청이 가능하다. 내가 사용한 필터가 돌고 돌아 다시 어디론가 흘러가게 된다.


내가 마신 물이 몸속에 흘러 다닌다. 채워졌다가 빠져나갔다가 다시 채워진다. 그러다가 한 곳에 몰릴 때가 있다. 그 물은 주로 발에 몰린다. 물이 모여서 크고 작은 물집이 만들어진다. 발에 생긴 물집을 보고 나서야 나를 돌아본다. 그것은 내가 가진 그릇이 작아서 일 것이다. 큰 시련이 닥칠 때마다 걷고 또 걸었다. 걸어야 숨을 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었다. 멈춰있던 생각들을 발밑으로 끌어내렸다. 걸음마다 생각을 흘려보냈다. 걸어야 살 수 있었다. 걷는다고 모든 고통이 끝나지는 않았다. 마음의 고통을 발의 고통으로 잊고 싶었던 것 같다. 난 바닥까지 내려가서 아파했다가 다시 발을 딛고 일어났다. 발에 잡힌 물집은 그 고통이 끝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발은 볼록한 물을 담고서 알아서 터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집이 터졌다. 시련 하나를 넘었다.


내게서 빠져나오는 물과 나를 씻겨주는 물이 있다. 깨끗했던 물은 나를 거쳐 더러운 물로 바뀐다. 그 물은 하수구를 통해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 흔적들은 화장실 곳곳에 있다. 이곳을 청소하는 일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내 더러움을 씻겨준 물들의 흔적을 지우는 일. 미뤄두었던 청소를 했다. 세숫대야에 물과 세제를 붓고 화장실 바닥에 뿌렸다. 거품이 가득한 물이 바닥에 내려앉았다. 수세미로 박박 문질렀다. ‘깨끗해져라 깨끗해져라.’ 수세미의 움직임에 따라 더러웠던 내 흔적이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신경을 쓰지 않으면 청소는 더 힘들어진다. 깨끗함을 유지하기 위해선 자주 청소해야 한다. 흔적이 생기기 전에 환기도 시켜주고 하수구에 있는 머리카락도 버려야 한다. 흔적이 지워졌다. 완벽하진 않지만 그래도 봐줄 만하다. 일주일에 한번 청소하자고 다시 한번 결심했다.


나를 거쳐 간 물은 모두 어디론가 흘러갔다. 고여있지 않았다. 내가 가진 아픔도 그랬다. 다 괜찮아질 것이다. 지금의 이 시련도 물 흐르듯이 흘러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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