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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어른일기 Jun 22. 2022

설렘을 입을 수 없다면 일단 저장

옷장을 열어보니 설레지 않은 옷 사이에 설렘을 주지만 입을 수 없는 옷들이 곳곳에 보였다. 다 추억이 있는 옷인데, 이제는 입지 못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자주 입었던 설렘들이다. 곤도 마리에는 말했다.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 하지만 아직 설렘이 남아있기에 일단 저장하려고 한다.


난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한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대청소를 하며 설레지 않는 옷과 물건을 정리하는 편이다. 눈앞에 물건들이 어지럽게 놓여있거나, 갈 곳을 잃어 헤매거나, 자신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라볼 때마다 어지러움을 느낀다. 내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 같아서다. 마음이 복잡할 땐 어떻게든 티가 난다.      


옷장을 열고 옷을 꺼냈다. 유럽에서 샀던 플라워 롱 원피스, 백화점에서 큰맘 먹고 산 네이비 슬랙스 팬츠, 화려한 패턴의 시스루 블라우스, 에스닉 미니 원피스, 등 설렘 한가득히 방바닥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붙박이 테이블 밑에 놓아둔 캐리어 두 개를 꺼냈다. 제주도 여행을 가려고 샀던 은색 캐리어와 유럽에 가기 위해 산 커다란 진회색 캐리어다. 이 캐리어를 끌고서 설렘을 안고 떠났던 여행지가 떠올랐다. 다시 여행할 수 있을까? 아무튼 당분간은 그럴 일은 없을 거라서 옷을 보관하기로 했다.    

  

옷들을 캐리어에 넣었다. 설렘 하나, 설렘 둘, 설렘 셋. 수많은 설렘이 담겼다. 그 설렘들은 캐리어에 저장된 채 봉인되었다. 캐리어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눈앞에서 설렘이 사라졌다.     

 

옷장 속 뒤죽박죽되어있던 옷들과 소품, 잡동사니를 정리했다. 옷과 물건들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옷장과 곳곳에 비어있는 공간을 보니 숨통이 트였다. 그렇게 또 다른 설렘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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