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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간어른일기 Jun 21. 2022

건조대 나무에 걸린 이불 두 조각

작은 공간에 전자제품이 만들어낸 소음이 돌아다닌다. 탁상용 미니 선풍기와 물이 차고 힘차게 돌아가다가 물 빠지는 세탁기 소리뿐이다. 이번 달에 이불 빨래를 했었나? 5월은 빠르게 중간까지 와버렸고 주말을 맞이해서 빨래하기로 했다. 아침부터 세탁기는 자신의 업무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수건을 세탁하고 그다음으로 이불과 베개커버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대 패드까지. 세탁기는 느슨했던 평일과 다르게 쉴 새 없이 열일 중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 탓에 오후가 되자 건조대에 이불과 베갯잇을 널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아서 잠들 때쯤 이불을 거둘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미니 선풍기로 이불에 바람을 쐬어 주기로 했다. 저번 달인가 저 저번 달인가 이불이 다 마르지 않아서 침대 매트를 덮고 잔 날이 있었다. 난 이불, 침대 패드, 베개 하나로 일 년을 보낸다. 작은 원룸에 이불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여름 이불과 겨울 이불을 분리할 여력이 되질 않는다. 일 년을 한 이불에서 자고 일어난다. 불편한 듯 불편하지 않게 적응해 나가는 걸 보면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란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집에 옵션으로 있는 세탁기는 9kg이다. 처음으로 이불 빨래를 했을 때 실패했었다. 막 세탁을 마친 이불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서 당황했었다. 바로 외출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건조대에 이불을 펼치고 모서리마다 빈 우유 팩과 플라스틱 통을 놓아두었다. 그날 난 외출하는 동안 좌불안석이었다. 첫 이불 빨래 실패 후 이불은 빨래방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빨래방은 길 건너편 두 번째 골목에 있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커다란 비닐봉지에 이불을 담고서 빨래방에 가곤 했다. 장마가 길어지는 여름날이면 옷들을 세탁하러 가기도 했다. 일 년 정도 빨래방을 이용하다가 어느 날 집에서 이불 빨래에 재도전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때는 실패한 것이 왜 이때는 성공했는지 그 이유를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빨래방에 가야 하는 수고스러움에서 벗어났다는 점이 기쁠 뿐이다.     


건조대로 인해 내 공간이 현저히 줄어든 집 혹은 방을 바라보며 처음 독립했을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짐이라고는 옷과 신발이 전부였다. 이 안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랐다. 혼자 사는 법을 가르쳐줄 사람도 배울 곳도 없었다. 텅 빈 공간이 어색했던 나날들은 계속 이어졌다. 혼자 사는 집이 낯설어 잠들기 전까지는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지친 몸으로 들어와 겨우 잠만 잤다. 이러다가 내가 죽겠다 싶어서 공간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그렇게 혼자 사는 법을 스스로 터득했다.


그 시절 나의 독립은 그저 독립이 아닌 진정으로 나를 찾기 위한 것에 의미가 컸다. 그게 가족들에겐 그저 투정이고 불만이며 한심하기 그지없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난 나로서 살기 위해 독립을 했다.      


고작 이불 하나 세탁했을 뿐인데 마음의 구정물이 빠져나간 기분이다. 나를 응원해 주지 않던 가족도 원망하던 나도. 다시 예전처럼 갈 수 없는 현실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돼버린 지금도. 모두 세탁기에 넣고 돌려버리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세탁기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섬유 유연제의 향기, 물기를 머금고 있어 축 늘어졌지만 깨끗하게 바뀐 모습, 건조대에 널어주기만 하면 알아서 물기를 털어내고 마치 처음처럼 보송보송해지는. 과거도, 사람도, 관계도 그리되었으면 좋겠다.     

 

마음의 구김살.

뭉쳐버린 슬픔.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미움.


어른의 나이지만, 어른이 아닌 채로 살아가는 어른이다. 건조대에 걸려 있는 이불 두 조각을 바라보며 다음 달이 되어야 또 이 모습을 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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