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22 - 비엔티엔, 방비엥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콩로에서 방비엥까지는 여자들이 콩로를 떠나면서 단단히 마음을 먹은 것이 무색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콩로로 들어가기까지가 쉽지 않았으므로 그곳에서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였다. 라오스의 국도와 만나기 위해서는 들어올 때 거쳤던 비엥캄과 나힌을 반대로 거쳐야 했다. 나힌을 지나고 비엥캄을 지나 마침내 큰 도로를 만났지만 버스는 오래 달리지 않았다. 길 곳곳에 보이지 않는 정거장이 있었다. 아무런 표지판이 없어도 버스가 지나가는 길에 사람이 서 있으면 그곳이 정거장이었다. 그랬으므로, 여자들은 버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 수만큼의 정거장을 지난 셈이다.
콩로를 떠난 버스는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엔까지만 가는 것이었다. 비엔티엔에서 다시 방비엥으로 가는 버스나 미니밴을 찾아 타야 했는데, 비엔티엔 북부터미널에서 남부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는지 그 반대로 남부터미널에서 북부터미널로 이동해야 했는지 여자는 더 이상 기억할 수 없지만 암튼 비엔티엔의 남북을 가로질러야 했고 비엔티엔은 그렇게 툭툭 안에서 스치듯 보고 지나쳐 곧바로 방비엥으로 갔다. 꼭 가고 싶었던 루앙프라방까지 갔다 다시 비엔티엔으로 돌아가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일정을 생각하면 시간이 빠듯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여자조차 텔레비전 여행 프로그램에서 얼핏 봤던 방비엥의 그, 꽃보다 청춘이라는 그, 생기 넘치는 도시에 얼른 도착하고 싶기도 했다.
북부인지 남부인지 터미널에서 남부인지 북부인지 터미널로 이동하는 툭툭에는 여행인지 출장인지를 가는 라오스 남자와 함께 탔다. 여자는 그렇게라도 비엔티엔을 기억해두려고 툭툭에 타고 있는 마리케와 테스의 사진을 찍었는데, 의도하진 않았지만 사진을 보면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명확하게 그 남자가 함께 찍혀 있었다. 후에 여자와 여자들은 그 사진을 보며 여고생처럼 어깨를 움찍 하며 웃어댔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들이었다. 그럼에도 비엔티엔에서의 기억이라고는 그 두 장의 사진과 그 사진 속 남자와 공교롭게도 그 남자와 함께여서 행복해 보이는 마리케와 테스의 사진이 거의 전부였으므로, 조금 창피한 기억이라고 해서 굳이 없었던 걸로 하기도 애매했다.
비엔티엔 북부인지 남부인지 방비엥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는 터미널에 도착해서 여자들은 타고 갈 가장 깨끗한 미니밴을 공수하고 간단하게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여자들은 바로 그곳에서부터, 앞으로 가는 곳마다 만날 한국인이 셀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오랜 여행과 장시간 이동으로 후줄근해진 여자들과 한눈에도 비교될 만큼 말끔하고 댄디하게 차려입은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남자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공수해둔 미니밴은 출발시각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지 않았다. 방비엥으로 갈 여행자들 모집이 끝나야만 출발하는 모양이었다. 한 시간을 기다렸던가, 두 시간을 기다렸던가, 역시 여자는 기억을 못하지만, 그래도 차 안에서 보내는 한 시간 혹은 두 시간보다는 훨씬 견딜만했으므로, 틈틈이 대체 우리는 언제 출발하는 거냐고 물어가며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아가며 미니밴이 출발하기를 기다렸다.
비엔티엔을 떠난 미니밴은 늦은 밤에 방비엥에 도착했다. 아홉 시를 훌쩍 넘겨서, 콩로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이 추천해준 숙소와 멀지 않은 곳에 미니밴은 정차했다. 방비엥에는 어마어마한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짐을 꺼내는 잠시 동안에도 어디 하나 마른 구석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젖게 만드는 그런 어마어마한 비였다. 벌써 몇 해 전에 사서 이미 너무 여러 번 세탁을 해서 본래의 기능을 잃은 비옷으로는 턱도 없는 비였다.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불과 백 미터도 안 되는 곳에 숙소가 있었지만, 숙소 안으로 뛰어 들어가 빈방이 있는지 물었을 때 여자들은 모두 말 그대로의 생쥐꼴이었다.
방에 들어가 속옷까지 완전히 젖은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고 여자들은, 다른 여행자들이 드러누워 프렌즈를 보고 있는 숙소 입구 식당에서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그것이 방비엥에서의 첫 번째 이벤트였고, 다음날 일어나서 다시 같은 곳에서 아침을 먹은 것이 방비엥에서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이벤트였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방비엥에서는 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모두들 드러누워 쉴 새 없이 프렌즈의 에피소드들만이 반복되는 텔레비전을 쳐다보고 있는 방비엥에 더 머물 만한 이유도 없었다. 그러므로 여자들은 당연히 다시 이동을 하기로, 결정했다.
방비엥에서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이 몹시 아름다웠노라고, 네팔 여행에서 만났던 존이 그랬었으므로, 여자는 낮에 루앙프라방으로 가게 된 것이 어쩌면 차라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길은 실로 아름답기도 했거니와 실로 위험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점심시간 무렵에 출발해 대여섯 시간이면 루앙프라방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지만 여자들은 해가 지고 있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여정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고도 1,350m의 지점에.
그리고 완전히 해가 진 후에도 차는 여전히 산속에 있어서, 여자들은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산 중턱에선 진흙에 바퀴가 빠져 움직이지 못하는 슬리핑 버스를 만났고, 그 버스가 하나뿐인 좁은 산길을 죄다 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 차를 빼낼 견인차가 오기까지 한 시간이 넘도록 기다려야 했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는,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만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깜깜해져 있었는데, 그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곳에서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와 모두를 기절시킬 뻔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차로 라오스를 이동 중인 중국인이었는데 운전 중에 잠깐 한눈을 팔았는지 어쨌는지 차가 길 밖으로 벗어나는 바람에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난 사람이었다. 다행히 차는 길과 낭떠러지 경계에서 멀지 않은 곳에 걸려 있었다. 하지만 여자가 탄 미니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도 차를 끌어올릴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 중국인은 영어도 라오어도 할 줄 몰랐고, 흔치 않은 일이지만 마침 그 미니밴 안에는 중국인도 전혀 없었으므로, 조난을 당한 중국인과 미니밴 기사, 미니밴에 타고 있던 여행자들은 전혀 서로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여자들은, 그 중국인은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았으니 그냥 두고 갔으면 했다. 서로 할 수 있는 말도 없고, 해 줄 수 있는 일도 없는데, 여자들을 태운 운전기사는 차마 그 남자를 두고 갈 수 없었는지,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서도 떠나지도 못하고 또 그곳에서 한 시간 정도를 더 망설였다. 시간이 조금씩 조금씩 흐를수록 여자들은 속내를 숨기지 않고 운전기사를 원망했다. 거의 하루 종일 차 안에 갇혀 구해줄 수 없는 조난자를 그냥 두고 가지 못해 망설이는 그 운전기사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측은지심이 그렇게 짜증스러울 수 없었다.
루앙프라방에 도착했을 때는 거의 밤 열 시쯤이었던 것 같고, 그곳에서 다시 썽태우를 타고 여행자 거리로 갔을 때는 열한 시가 다 돼서 웬만한 숙소들 문도 굳게 닫힌 상태였다. 그 와중에 여자들을 실은 썽태우 기사는 마치 전진을 하듯 후진을 하다가 그 골목 약국 앞에 정차돼 있던 차를 꽝하고 박아버렸다. 여자와 여자들, 그리고 함께 타고 있던 다른 여행자가 모두 그 접촉사고를 예견하고 썽태우 기사가 후진을 시작했을 때 이미 '노노노노노노노'와 '스탑스탑스탑'을 합창했지만 기사는 듣지 못했다.
그날 밤, 여자들이 누울 곳을 찾은 것은 그날 만난 유일한 행운이자 그날 누린 유일한 사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