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23 - 루앙프라방 꽝시 폭포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루앙프라방에서의 첫 아침은 여자에게는 좀 특별했다. 우선 그곳은 여자에게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여행지였다. 한국으로 돌아가려면 비엔티엔에 들러야 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여자에게 비엔티엔은 말 그대로 비행기 타기 전 들르는 경유지에 불과했다. 더구나 숙소 인근 동네는 전날 밤늦게 도착해 어둠 속에서 얼핏 봤을 뿐인데도 날이 밝으면 너무 예쁠 것 같다는 확신을 주었으므로, 여자에게 그 날 아침은 마치 원치 않는 사람에게로 시집가기 전 날 밤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웨딩케이크 같은 날이었다.
여행에서 이미 돌아온 요즘도 마찬가지지만 여자는 언젠가부터 눈 뜨면 항상 가장 먼저 허기를 느꼈다. 그날 역시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떠올린 문장은 ‘배고프다’였고, 테스와 마리케도 배가 고팠으므로 여행자 거리로 아침을 먹으러 나갔다. 여자는 방비엥처럼 루앙프라방에도 한국인들이 득시글거릴 것이라는 약간의 공포를 갖고 있었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다행히 그렇진 않았다. 물론 아무리 봐도 여행자의 약 절반 정도는 한국인이었지만 전반적으로 여행자 수가 많지 않았으므로 다른 한국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이 너무 많을까 봐 지레 겁먹은 스스로에 대해 여자는 ‘역시 별로’라고 자평했다. 본인도 한국인이면서, 한국에서 살 때는 자신도 그 틈에 섞여 자신의 출신과 국적에 대해서 대단히 진지하고 심각하게 고찰하지도 않으면서 굳이 해외에 나가면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 하나하나를 모두 신경 쓰고 경계하는 자신이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 떠나서까지 한국인들을 많이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었다. 사실 여자는 어떤 곳으로 가서 한국인을 한 명도 만나지 못하면 그런 걸로 근거 없이 우쭐해지기까지 하는, 굉장한 속물이기도 했다.
아침의 빛을 받은 루앙프라방은 전날 밤의 기대에 응답하듯 아기자기하고 예뻤다. 특별한 것이 없어서 특별해 보이는 동네였다. 대단한 개성 없이 비슷비슷한 카페나 레스토랑들이 비슷비슷하게 다 예뻤고 그래서 어디를 들어가 앉아도 기분 좋게 아침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여자들은 골목의 중간에 못 미치는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침을 먹고 그제야 오늘 뭐 하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오전엔 여기저기 걸으면서 구경 좀 하다가 오후에 꽝시 폭포에 갈까?
여자가 물었다.
꽝시 폭포 가려면 또 뭐 타야 하지?
마리케가 물었다.
아마 그럴 거야. 미니밴 타고 삼사십 분 정도 가야 한다고 들었어.
여자의 얘기를 듣고 테스가 마리케를 쳐다봤다.
그럼 우리 오늘은 꽝시 폭포에 가지 말자. 난 오늘 하루만큼은 아무 탈것도 타고 싶지 않아.
나도 그래. 미니밴이든, 썽태우든, 오토바이든, 오늘 하루만큼은 타고 싶지 않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여자에게 남은 시간은 이틀, 테스와 마리케에게 남은 시간은 사흘에서 나흘이었다. 여자는 이틀 후 루앙프라방을 떠나 비엔티엔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고, 여자들은 사나흘 후 라오스 국경으로 가 중국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루앙프라방에서 다른 곳은 몰라도 꽝시 폭포는 꼭 가보고 싶었기 때문에 여자는 그날 오후에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에 마주쳤던 여행사 직원을 찾아가 한 시에 그곳에서 꽝시 폭포로 떠나는 밴을 예약하고 여자들이 모두 똑같이 바랐던 대로 두 발로 걸으며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여행자 거리와 한 블록 떨어져 있는 메콩강변을 따라 걸었다. 걷는 동안 메콩강을 건너면 저편에 올라가 볼 수 있는 절이 하나 있다는 뱃사공을 만났고, 꽝시 폭포에 갈 계획이 없느냐는 미니밴과 썽태우 기사들을 만났고, 부다 케이브까지 가는 보트를 갖고 있다는 여행사 사장도 만났다.
누구와 눈이 마주치는 것이 겁이 날 정도로 호객꾼들이 많았지만, 왠지 손을 담가 퍼 올리면 걸쭉하게 점성이 느껴질 것처럼 짙은 황갈색의 메콩강과, 그 강물 색깔에 지지 않겠다는 듯 진한 녹색을 뿜어대고 있는 나무들로 시선을 보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처음엔 입 밖으로 'Sorry'를 소리 내어 말하며 손을 내젓거나 목례를 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예를 갖춰하던 거절의 방식은, 걸을수록 단출해졌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만으로 'Sorry'를 만들어 보여주거나, 입술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살짝 흔들거나, 손만 젓거나 하는 식으로.
숙소에서 시작해 몇 백 미터 가량 걸어 강의 한쪽 끝까지 걸어간 후에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마을 안쪽을 향해 걸으며 목적 없이 이것저것 구경하는 것으로 오전 나절을 보냈다. 그리고 약속한 한 시가 다 됐을 때 여자는 밴 기사를 처음 만났던 약속 장소로 갔다.
차에 가장 먼저 탄 사람이 여자였으므로 밴 안의 빈자리를 거의 다 채울 만큼 여행자들을 태우고 마침내 꽝시 폭포를 향해 출발한 것은 그로부터 약 삼십 분이 지난 후였고, 꽝시 폭포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약 사십 분이 지난 후였다. 여행을 다녀온 후 몇 달이 지나서 그제야 본 꽃보다 청춘에서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그 길은 미니밴을 타고 가기에도 만만치 않았다. 포장돼있지 않은 바닥은 큰 돌이 많이 박혀 울퉁불퉁했고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여기저기 패어있어서 미니밴은 쉬지 않고 덜컹거렸다. 테스와 마리케가 피하고 싶었던 상황이 딱 그것이었다.
하지만 꽝시 폭포에 들어서는 순간 여자는 후회를 잊었다. 세상에 그런 것은 처음 보는 종류의 폭포였다. 아이슬란드에 가서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는 데티포스부터 무지개가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걸려 있던 스코가포스, 앞뒤로 정신없이 폭포가 쏟아지던 셀야란즈포스를 보았고, 라오스에서도 이미 돈콘섬에서 메콩강과 만나는 거대한 리피 폭포와 볼라벤 고원에서의 수많은 폭포들을 본 후였지만 꽝시 폭포는 또 달랐다. 계단식 석회암 절벽들을 조금씩 타고 내려온 폭포의 물빛은 교과서에서 본 에메랄드빛 그 자체였다.
높은 나무에서 다이빙하고 폭포수 안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은 물속에서 논다기보다는 빛 속에서 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그제야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깊이 인식했다. 사실 그 여행이 시작될 수 있게 한 것도 여자가 수영을 할 수 없는 처지가 된 것과 같은 이유였지만, 그냥 놀 때는 전혀 인지조차 하지 않고 있다가 몸을 담그고 싶은 물가에 가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 배우가 된 것 같았다.
혹시라도 몸만 살짝 담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고 옷 속에 수영복을 입고 가긴 했지만, 수영장이나 바다가 아니었기 때문에 발만 살짝 담그기는 힘들었다. 몸을 완전히 넣고 놀거나 밖에서 구경만 하거나, 둘 중 하나밖에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은 이후 여자가 몸소 확인하기도 했는데, 폭포의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길에 물에 몸의 일부라도 담가보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얕아 보이는 물가로 살금살금 걸어 들어갔는데, 물속에 숨어 있던 미끄러운 진흙이 여자를 확 끌어당겼다.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여자는 흰색 원피스를 입고 순식간에 물 위로 넘어졌는데, 진흙 바닥이 미끄러워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도 않았다.
그때 여자에게 손을 내민 것은 호주에서 온 아줌마였다. 그 아줌마로 말할 것 같으면 루앙프라방 시내에서 꽝시 폭포로 올 때 여자의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으로, 루앙프라방에 도착한 순간부터 예약한 호텔에 문제가 생겨 이것저것 불만이 많았던 차에 밴 옆자리에서 여자를 만나 처음부터 끝까지 불만을 토로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여자가 격렬하게 혼자 있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었다.
심지어 폭포 입구부터 중턱까지도 계속 여자에게 말을 걸며 따라와서 여자는 마음속으로 짜증을 내고 있었는데, 미끄러운 길에 대한 극심한 공포를 가진 여자가 폭포 위쪽으로 등반하는 것을 포기하면서 자연스레 헤어졌다가 바로 그 순간, 누구 한 명만 손을 내밀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 여자 앞에 나타나서 정말로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귀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시작한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겨우 조금씩 귓속이 말라가고 있었다. 그랬는데 그곳에서, 그 아름다운 꽝시 폭포에서, 말라가고 있던 귓속에 다시 물이 들어가는 공포를 경험하는 동시에, 모두들 수영복을 입고 자유롭게 노는데 거의 혼자만 수영복이 아닌 복장을 하고서 주변을 걷기만 하다가 결국은 물속으로 미끄러졌다는 사실에 대한 수치심까지 느꼈을 때, 여자가 가장 귀찮아했고 가장 만나고 싶지 않아했던 사람이 나타나 미끄러진 채 쉽게 일어나지도 못하는 여자를 일으켜준 것이다.
그래서 여자에게 꽝시 폭포는 꽝 하고 넘어졌던 그 순간과, 그 순간 여자에게 내밀어진 검은 꽃이 핀 백인 중년 여자의 손과, 올라갈 때도 보았고 내려올 때도 보았던 시체처럼 물 위에 떠 있던 여자, 이 세 가지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