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24 - 루앙프라방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마음속으로는 감탄을 연발했지만 냉정하게 돌아보면 우울했던 꽝시 폭포 구경ㅡ남들은 놀러 가는데 본인은 구경하고 왔다는 것이, 그 구경이 자의가 아니었다는 것이, 그 결과가 결국은 꽝 하고 넘어지는 것이었다는 것이 여자의 기분을 그곳에 있었던 누구보다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혔다. 똑같이 돈 내고 스트립클럽에 가서 내내 먼 산만 바라보다 온 기분이었으니까ㅡ에서 돌아와 여자는 우선 숙소로 갔다. 똥물에 빠졌다 나온 것 같은 흰색 원피스를 갈아입고, 와이파이로 테스와 마리케에게 본인이 돌아왔음을 알려야 했으니까.
테스와 마리케는 곧장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알려줬다. 메콩강가에 있는 북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얼른 오라, 맛있는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도 알아뒀다, 가 여자들이 여자에게 보내준 답이었다. 여자들이 약도를 보내준 북카페를 찾아가면서 여자는 나 거기 가서 완전 꽝 하고 이렇게 넘어졌잖아 하고 칭얼대는 상상을 하며 메콩강변을 따라 걸었다. 북카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동네가 크지 않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웬만한 간판은 다 한 번씩 눈으로 훑었던 덕분이었다.
테스와 마리케는 실내와 실외의 경계쯤의 테이블에 앉아 있다가, 여자를 보자마자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와. 꽝시 폭포는 좋았어?
하고 묻는데, 여자는 계획과는 다르게 너무 좋았다고 답했다. 그러자 테스와 마리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발을 번쩍 들어 보이며 페디큐어를 자랑했다. 여자들의 발톱에는 각각 빨강과 검정 매니큐어가 곱게 칠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그날 오후는 여자들에게 발을 위한 날이었던 것이다. 최대한 조금 걷고, 최대한 예쁘게 단장해주는 그런 날. 그렇게 얘기하다 보니 여자 역시 마지막에 꽝 하고 넘어진 것이 별 일 아니게 느껴졌다. 꽝시 폭포에 올라가는 내내 감탄했으면서,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 또 찍고 눈으로 보고 또 봤으면서, 그 에메랄드빛 물속에 담긴 몸들이 너무 아름답다고 느꼈으면서, 막판에 한 번 넘어졌다고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삐쳐서는 꽝시 폭포를 겨우 꽝 하고 넘어진 곳으로 기억하려 말려고 들었던 자신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다.
꽝시 폭포 너무 좋더라. 너희도 꼭 가 봐. 수영복도 꼭 챙기고.
여자가 말했다.
언제? 너 가고 없을 때?
테스인지 마리케인지가 말했다.
히잉-
마리케인지 테스인지가 울상을 하며 여자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다 같이 웃었다.
여자들이 알아둔 식당은 강 건너에 있었다.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려면 얼마간의 돈을 내야 했지만 식당에서 밥을 사 먹으면 밥값에서 뱃삯만큼을 빼준다고 했다. 그러니까 밥을 먹으면 배는 공짜. 매력적인 거래였다.
탈 때는 배를 타면 균형을 잡지 못하는 여자를 제일 먼저 태우고, 내릴 때는 먼저 내려 균형을 잡지 못해 요상한 소리를 내는 여자를 잡아주는 테스와 마리케가 데려간 식당은 강 건너 언덕에 있는, 오랜만에 로맨틱한 무드의 나름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라오스에서 먹는 대부분의 음식들이 만족스러웠기에 가급적이면 가장 저렴한 메뉴들로만 골라 먹어왔던 여자들도 그 날만은 가격 생각하지 말고 먹고 싶은 걸 좀 먹어볼까 하고 의기투합을 했지만 먹고 싶은 걸 골라도 어째 개중에는 가장 저렴한 축에 드는 메뉴들로만 골랐다.
그러는 사이 테스와 마리케가 캄보디아 여행 중에 처음 만났다가 그곳 루앙프라방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며 초대한 중국인 친구 코코가 합류했고, 다시 코코의 프랑스인 친구 빅토리아가 합류해 여자만 다섯이서 끝없이 수다를 떨며 저녁을 먹었다.
코코는 굉장히 작은 키에 마르기까지 해서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 아이 같아 보일 정도로 덩치가 작았다. 덩치는 가장 작았지만 이마는 가장 넓었고 머리도 가장 길어서 아이 같으면서도 어딘가 할머니 같아 보이기도 하는 오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빅토리아는 아무리 같은 프랑스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캄폿 올리스플레이스의 여름 주인인 쥘과 말투가 너무 같아서 왠지 낯설지 않으면서도 또 쉽게 친해지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빅토리아는 여자이고 쥘은 남자였지만 두 사람은 목소리 톤뿐만 아니라 특정 단어를 약간씩 더듬는 지점까지 거의 똑같았다.
수다스러운 저녁식사가 끝나갈 무렵 빅토리아가 그곳에서 유명한 펍에 다 함께 놀러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여자들은 왜 안 되겠느냐며 조금 더 늦은 시각에 다시 빅토리아와 코코를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저녁을 먹고 다시 시내로 나가 어슬렁거리며 밤 시장을 구경한 여자들은 빅토리아와 코코를 다시 만나 미로 같은 유토피아의 입구를 찾아냈는데, 그곳은 이미 여행자들로 가득했다. 일하는 사람은 모두 현지인이었고, 마시고 노는 사람은 모두 여행자였으며 심지어 여자와 코코를 제외하면 동양인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캄보디아 시하눅빌에서 여자 혼자 묵었던 유토피아와 마찬가지로, 라오스 루앙프라방에 친구들과 함께 간 유토피아 역시 여자로서는 왠지 편하지가 않았다. 그건 테스와 마리케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건 기분 좋은 빅토리아가 찍어댄 사진들만 봐도 그랬다. 웃고 있는데 즐거워 보이지 않는 테스와 마리케의 사진을 보고 여자들은 그렇게나 웃어댔다. 가장 즐거웠던 순간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는 자신들이 찍힌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봤던 그때였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준 빅토리아는 여자들이 웃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곳은 너무 시끄러워서 대화조차 여의치 않았다. 누구 한 명이 다른 누구 한 명과 이야기를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 대화를 전혀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누구 한 두 명은 대화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어서 옆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애매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맥주를 홀짝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일 뿐이었던 그곳에서 빠져나온 것은 그러나 밤 열한 시가 넘어서였던 것 같다.
먼저 일어서겠다는 여자들에게 빅토리아는 다음 날 함께 빡우 동굴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여럿이 배를 빌리는 편이 더 저렴하고 좋지 않겠느냐고. 여자들은 그러자며 다음날 아침에 다시 빅토리아와 코코와 만날 약속을 정한 후에야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신나게 놀았다고 말하기도 뭣하고 왠지 피곤한 밤이었다. 여자들은 늘 하던 대로 한 사람씩 씻었다. 누군가 씻는 동안 나머지 두 사람은 각자 책을 읽거나 사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마침내 세 사람이 모두 침대에 누워 방의 불을 껐을 때 비로소 마침내 마음속의 모든 소란도 잦아들었던 그런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 빅토리아와 코코를 만나기 한 시간 전쯤 나가 아침을 먹었다. 누가 딱히 말을 한 것도 아니지만, 아침까지 함께 먹고 싶지는 않았다고, 나중에 그날 밤이 돼서야 누군가 이야기했고, 다른 두 사람도 똑같은 마음이었음을 고백했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나자, 아침을 든든히 먹어두길 잘했다 싶은 하루가 시작됐다. 코코가 길을 찾지 못해 약속한 시간보다 삼십 분 늦게 도착했고, 코코가 도착한 후 시작된 보트 주인과의 협상에 피곤해진 여자들은 그냥 툭툭을 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빅토리아의 고집에 보트를 타게 됐다. 비용도 더 비쌌고 지루한 에누리 과정도 싫었던 데다가 툭툭을 타면 왕복 한 시간, 보트를 타면 갈 때 두 시간, 돌아올 때 한 시간, 모두 세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여자들은 그냥 툭툭을 탔으면 하는 마음이었지만 빅토리아 혼자서 배를 타게 두면 다섯 명이 나눠서 내는 것보다 다섯 배는 더 비싼 값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빡우 동굴에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 거기에 배를 타고 가도 그만 툭툭을 타고 가도 그만인 여자들보다는, 빡우 동굴에 꼭 가고 싶으며 거기엔 꼭 보트를 타고 가고 싶었던 빅토리아의 뜻이 더 명확하고 강렬했으므로 여자들은 결국 왕복 세 시간짜리 슬로 보트에 몸을 실었다.
가는 길은, 글쎄, 그런 마음이었어서 그런지 왠지 지루했다. 처음 배에 앉아 메콩 강물 위를 떠다니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지만, 가다 강 위에 떠 있던 주유 보트에서 기름을 채워 넣는 광경도 흥미로웠지만, 그것이 두 시간 가까이 지속되니 지루했다. 가방을 끌어안고 앉았다가, 발을 의자 끝에 걸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가, 엉덩이를 의자 끝에 걸치고 누울 듯이 앉았다가, 밖을 쳐다봤다가, 물을 쳐다봤다가, 앞에 앉은 여자들의 뒷모습과 전화번호 같은 숫자가 프린트된 뱃사공의 등을 쳐다봤다가,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 두 시간이 다 가고 어느새 빡우 동굴, 불상이 너무 많아서 부다 동굴로도 불리는 그곳 입구에 도착했다.
동굴은 위쪽과 아래쪽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 모두 이름에 걸맞게 불상들로 가득했다. 여자는 사실 보면서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불상들이 참 많네. 그 정도가 감상의 전부였달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곳에서 돌아와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다시 보니 왠지 그곳을 즐겼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것이었다. 여자는 원래 같은 것이 가득 모여 있는 장면이나 공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똑같은 파라솔과 똑같은 썬베드가 모래사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득 놓인 해운대나 똑같은 크기의 창문이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정면이나 비슷한 크기의 책이 빽빽이 꽂힌 책장 같은 것들, 비슷한 크기의 잔들이 진열된 술집의 진열대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을 보면 여자는 언제나 사진을 찍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다 동굴에서도 여자는 불상들이 가득 놓여 있는 그 공간을 참 많이도 찍었다, 싶을 정도로 많이 찍었다.
많이도, 찍었네.
그러게, 난 이렇게 비슷한 것들이 가득 모여있는 걸 보면 그렇게 찍게 돼, 사진을.
왜?
잘 모르겠어. 만약 그걸 내가 알아내서 거기에 대해 쓸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작가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걸 모르겠어. 설명을 못하겠어.
그럼 지금 한 번 해 봐.
지금?
응, 지금.
음.. 글쎄,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인데 사람들 앞에서는 안 그런 척해. 아니, 꼭 안 그런 척하는 건 아닌데 사람들은 내가 혼자서도 아주 신나게 즐겁게 잘 먹고 잘 사는 줄로 알아. 그래서 저렇게 비슷한 것들끼리 빼곡히 모여 있는 걸 보는 게 그냥 좋은 건가? 본능적으로? 아니다. 이건 좀 구리다.
아니야, 그럴듯한데?
음.. 그것도 아니면 이것도 그냥 일종의 유전자 같은 거 아닐까? 이건 뭐 내가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냥 내 유전자에 ‘넌 저런 그림을 좋아하게 생겨 먹었다’라고 새겨져 있는 거지.
너무 쉬운 거 아냐? 그런 식이면 모든 게 다 유전자 탓이게?
응, 너무 편하지?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가 없어져.
다음에 만날 땐 그 이유를 한 번 잘 설명해봐. 난 네가 처음 말한 그 이유도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네 마음에 안 드니까.
다 떠나서, 부처님들이 거기 가득 모여 있는 걸 보니까 여자는 뭔가 그 어두컴컴하고, 배를 타지 않으면 닿을 수 없는 그 절벽 같은 동굴 속에 부처님들이 가득 모여 있는 걸 보니까 그냥 사진으로 찍어두고 한 번씩 살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거기 불상들을 왜 그렇게 모아놨을까. 백지장도 맞들면 나으니까 부다 파워도 거기 모아두면 상상 이상의 파워를 가질 것으로 생각하는 걸까. 혹시 이 불상이 다치거나 까져도, 옆에 있던 불상이 자신을 굽어 살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모르겠다!
‘모르겠다’라는 말만큼 편한 말도 없다. 여자는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을 때 그 말을 사용한다.
돌아가는 길은 가는 길의 절반이었다. 강물을 거슬러 가는 게 두 시간이면, 강물을 따라 가는 건 한 시간. 딱 절반. 뭔가 교훈을 얻기 딱 좋은 얘기지만 여자는 그것을 그저 과학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그날 오후와 그날 밤은, 여자들이 함께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으니까.
테스와 마리케는 맥주를 좋아하는 여자에게 ‘Princess Beer'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네덜란드 왕자는 술 문제로 항상 국민들의 놀림거리였다는 얘기를 덧붙였지만 여자가 프린세스 비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며, 테스와 마리케는 또 웃었다.
프린세스 비어와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까 맥주를 마시러 가자.
루앙프라방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소박한 선물들을 사고 곧 태어날 여자의 조카와 친구의 아이들에게 선물할 귀여운 신발을 산 후 여자들은 맥주를 마시러 갔다. 맥주를 마시며 나눈 이야기들은 다른 날과 다를 것 없이 시시콜콜, 시시껄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