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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Apr 25. 2016

매일 뜨고 지는 게 해라도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09 - 캄보디아 캄폿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해질녘에는 올리스 플레이스 데크에 앉아 해지는 모습을 기다렸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이 많고 해뜨는 것 또한, 보이지 않는 것이 오지 않는 것과 같다면, 기다린다고 반드시 오는 건 아닌 것 중에 하나였다. 하지만 해지는 건 다르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해지는 건 기다리면 반드시 온다고.


무엇보다 뜨는 건 순식간이라도 저무는 건 서서히, 라서 더 좋다ㅡ일찍 일어나는 게 힘들어서가 절대로 아니다 ㅡ고 생각해온 여자로선, 그곳 일몰이 너무 짧아 조금 당혹스러웠다. 의미 있는 일과 중 하나라 좀 더 오래 뭉근하게 즐기고 싶었다. 쌀에 물을 가득 붓고 약한 불에 끓이면 단단하던 쌀알이 조금씩 뭉근하게 뭉개지며 미음이 되는 것처럼, 낮을 그 강물 속에 다 집어넣고 태양 중불에 은근히 끓인다는 기분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지켜볼 수 있기를 바랐지만 캄폿에서 보는 '해지는 동안'은 특히 좀 짧다 느꼈다.


낮이 강물 속에 녹아들어가 붉게 끓다 결국 까맣게 자취를 감추는 걸 지켜보려고, 그걸 보면서 더 맛있게 맥주 마시려고, 올리스 플레이스 데크에 앉으면 강 한가운데 빽빽한 밀림이 보였다. 높이가 비슷해서 그 속은 보이지 않았지만 데크에서 보면 그냥 일렬로 주욱 늘어서 있는 것 같았다. 일몰은 언제나 그 일렬 밀림의 가장 왼쪽에서 불거져 정신 차리고 보면 어느 순간 온통 깜깜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무렵이면 어김없이 작은 배가, 강 위에서 일몰을 맞으려는 여행자들을 태우고 밀림 부근을 조용히 지나갔다.



며칠 후 여자는 캄폿에서 차로 삼십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바다마을 까엡(Kep)에 놀러 갔다 올리스 플레이스에서 보는 일몰이 짧게 느껴진 이유를 알게 됐다. 올리스 플레이스는 서쪽에 있어 일출 보기 좋은 곳이지 일몰 보기 적합한 곳은 아니었던 거다. 여자는 그럴 계획 아니었지만 해가 완전히 질 때까지 올리스 플레이스의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강 이쪽에서 짧게 헤어졌던 일몰을 강 저쪽에서 길게 이별했다. 어차피 헤어질 걸 알지만 매달려 보는 데까지는 매달려보는 온기 다한 연인에게 질척대는 느낌으로. 한번으로 족해야하는데 여자는 오히려 캄폿을 떠나기 전까지는 매일 그 시간 그곳, 강 건너편으로 와서 일몰을 더더 오래 보기로 결심했다. 일몰도 좋아하고 현지인 느낌 내는 것도 좋아하는 여자로서는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시간에 딱히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여자에게 캄폿은 올리스 플레이스와 일몰과 일출의 공간이었다.


일몰이라든가, 일출이라든가 하는 것은 전 세계 어딜 가나 하루 한 번은 경험할 수 있는 흔하고 규칙적인 현상일 뿐이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그 순간을 관찰하면 언제든 어디서 보든 일정 수준 이상으로 아름답다. 일몰은 단두대조차 아름답게 보이는 마력을 갖고 있다고 밀란 쿤데라도 말했다. 그러나 강을 낀 도시의 일출과 일몰은 그냥 '아름답다'라는 말로는 모자라다. 특히 캄폿은 강폭이 좁은 편인 데 비해 길이는 길고 강 양쪽 건물들도 낮아서 일출과 일몰을 오랫동안 관찰하기에 좋았다. 좋아하는 장면을 하루 두 번, 그때마다 하늘에서 한 번, 강물 위에서 또 한 번, 총 네 번을 볼 수 있으니 그 이상의 장소는 찾기 힘들 것이다. 세계 삼대 일몰에 캄폿의 것이 들어가지 않는 건 순전히 세계 삼대 일몰을 꼽은 사람이 캄폿에 가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강변에 앉아 맥주 마시고 책 보며 해지기를 기다리는 일. 바빠죽는 도시 사람들에게는, 목표로 숨가쁘게 달리는 부지런한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시간 아깝고 한심한 일이 또 없을지 모른다. 여자도 여행 오기 전에는 그랬다. 한심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고, 그럴 시간이 없는 날들이 반복되다 보니 그건 판타지에 가까웠다. 언제 해지는지 모르고 또 언제 해뜨는지도 모른 채, 지쳐 쓰러지듯 잠들고 알림시계에 의지해야만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보지 못했다면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라는 논리를 적용하면 한동안 여자에게는 일출도 일몰도 모두 없었던 셈이다.


여기서 하나 거기서 하나 똑같은 걸 왜 굳이 거기 가서 하느냐고, 뭐가 다르냐고, 더 좋으냐고 여자의 엄마가 물었었다. 여자는 잘 모르겠지만 그냥 좋다고 했었다. 거기서 일몰 보다가 여자는 뭐가 다른지 알게 됐다. 그게 맥주 마시는 거든, 책 보는 거든, 가만 앉아 해지는 걸 보는 거든, 일단 그걸 하기로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었다. 그게 달랐다. 그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 그걸 하는 게 할 일의 전부였다. 억지로 시간 내거나 기회 만들지 않아도 됐다. 그게 달랐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을 거라서 긴장한 채로 내일을 맞을 필요 없었다. 내일이 오면 오는구나, 내일은 또 내일의 일출과 일몰이 있겠구나, 하면 그만이었다. 그게 달랐다. 여자는 엄마도 그걸 같이 겪어봤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여자의 엄마는 내일이 쉬는 날이면 오늘 밤이 아까워서 잠을 못 잤다. 잠은 오는데 억지로 참다가 자는 것도 안 자는 것도 아닌 채 자정을 맞곤 했다. 결국 포기하고 완전히 눕는 시각은 늘 자정을 넘기지 못했다. 그런 엄마가, 내일 쉬는데 오늘 일찍 자는 게 아까워서 버티고 버티지 않아도 되는 생활을 아주 평온한 마음으로, 내일이고 모레고 따위는 개의치 않는 상태를 겪어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출신 모르는 동남아 모기에 물리는 게 찝찝하다 했겠지, 도마뱀 나오는 샤워실이 싫다 했겠지. 다 싫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은데 그래도 여자와 함께라는 점 하나 때문에 며칠 정도는 그래도 기쁘게 참겠지.


떠나오면 떠나있어서 편해지는 여자와 떠나오면 떠나왔다는 것 때문에 불안한 엄마가 모두,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적어도 캄폿은 아니겠지, 그런 생각들이 강물 위에서 일렁이고 출렁였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극장에 가서 같은 무성영화를 보는 여자처럼 매일 비슷한 시간 비슷한 자리에서 해지는 걸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멋있는 남자 아니어서 조금 실망했지만 그녀는 '마린Marine'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예쁜 대학생이었다. 여자는 난생 처음 혼자 배낭여행을 와봤다는 벨기에 소녀 마린과 나란히 앉아 무언가를 기다렸다. 어제도 그제도 본 거지만 매일 어딘가 조금씩 다른 하늘을 주시하며 오랫동안 개봉을 기다린 영화 예고편을 보듯 얌전히.


그전까지 혼자 감탄하며 감탄사를 명치에서 삼켜야 했지만 그날만큼은 마린과 함께 마음껏 감탄사를 내뱉었다. 배에서부터 감탄사가 끓어나올 때는 그걸 소리로 내뱉지 못하면 그 에너지가 뇌로 가서 부풀어 버린다. 여자는 단 한 번이지만 그 모든 마음의 소리를 실컷 뱉을 수 있게 옆에 앉아준 마린과 보낸 그 시간을 잊지 않았다. 


Sunset with Marine. 여자가 싱어송라이터라면 지어불렀을 노래. 여자가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라서 아직 세상에는 없는 노래. 선셋 위드 마린.



더구나 마린은 여자를 씨판돈으로 인도했다. 여행책 한번 들춰보지 않고 여행중인 여자는 씨판돈, 포따운전드아일랜드(4 thousands islands)라는 지명을 처음 들었다. 마린은 캄폿을 떠난 후에는 바탐방으로 가 배를 타고 씨엠립으로, 씨엠립에서는 밴을 타고 국경을 넘어 씨판돈으로 간다 했다. 사천 개의 섬, 이라는 이름의 군도가 있다니. 여자는 그 이름만 듣고도 거기 가기로 결정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별 계획 없었는데 계획이 생겼다.


바다와 함께 해지는 걸 봤고, 바다가 사천 개의 섬으로 인도했다.



여자가 올리스 플레이스 반대편에서 일몰 보고 온 첫날, 쥘과 세바스티앙, 사이먼에게 엄청나게 아름다운 일몰을 보고 오는 길이라고 자랑했는데, 그들 모두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제대로 본 적이 없나. 조금 실망했지만 체념하지 않고 물었다.


"이곳에서 일출 본 적 있어?"



올리스 플레이스 아닌 다른 곳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있었어도, 올리스 플레이스에서 일출을 본 사람은 없었다. 여자는 그곳을 떠나기 전에 꼭 한번 일출을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려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거나 아예 밤을 새워야 했다. 더 자신 있는 쪽은 아무래도 밤을 새우는 쪽이었다. 그날은 아픈 쥘 대신 PK가 밤까지 바를 보고 있던 날이었고, 그날은 아침형 인간이라 벌써 자러 들어갔어야 할 멜라니가 바 옆 소파에 누워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던 날이었다. 여자는 그들과 시간을 보내며 밤을 새워볼까 했지만 그날따라 모기퇴치용 스프레이와 로션이 말을 듣지 않는지 모기가 너무 성가시게 굴었다. 결국은 모기 때문에 안 되겠다고 말하고 여자는 일단 방갈로로 가서 잠을 청해봤다. 하지만 늘 새벽 2~3시가 넘어야 자던 여자가 겨우 저녁 9시~10시에 잠들 리는 만무했다.


한 두 시간 정도 누워 잠들려고 노력해보다가 결국은 다시 바로 갔지만, 바도 마감을 했는지 아무도 없고 어두웠다. 아직은 사이먼이 나타날 시간도 아니어서 여자는 결국 바로 옆에 있는 나가(NAGA) 게스트하우스에라도 가서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주섬주섬 챙겨 나가에 갔을 때, 여자는 그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PK와 멜라니가 그곳에서 맥주와 사이더를 마시고 있었던 거였다.



점심때까지 잠을 잤던 여자는 보지 못했지만 여러 목격자에 따르면 PK는 근무를 시작했던 아침 7시부터 이미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고 했다. 평소 같으면 3시 퇴근이지만 그날은 아픈 쥘 대신 9시가 넘도록 바와 리셉션을 지켰으므로 PK가 도대체 맥주를 얼마나 마셨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몰랐지만, PK가 꽤 많은 맥주를 마셨으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35도가 넘는 기온에 아침 7시부터 대략 14시간 이상 꾸준히 맥주를 마신 PK는 웬일로 깨어 있던 멜라니에게 나가로 가서 술 한 잔 더 하자고 권했고, 당시 비자 만기를 일주일도 남겨놓지 않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멜리니도 "와이낫?"하며 PK를 따라갔다고 한다.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만남에 여자는 PK와 멜라니, 바텐더인 톰과 함께 기분 좋게 술을 마셨다. PK는 너무 취해서 잠시 후 아내와 딸들이 있는 집으로 먼저 돌아갔다.



그때, 상의를 탈의한 한 청년이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하고 친구들과 여행 중인 남아공 출신의 에두아드는 여자에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여자는 현재는 여행을 하고 있지만 여행에서 돌아가면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에두아드는 여자가 글을 쓴다는 말에 여행 중 읽었던 책 이야기를 꺼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었는데, 너무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여자가 십 대 때 가장 좋아했던 책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였으므로 에두아드와는 할 얘기가 많았다. 영화 <인투 더 와일드>며 여러 이야기를 나눠보니 삶에 대한 가치관이 비슷하다고 느낀 그 순간, 에두아드가 이번에는 여자의 왼쪽에 앉아있던 멜라니에게 말을 걸었다.


"넌 왜 술을 안 마셔?"


사이더 두 병으로 이미 조금 취한 멜라니가 대답했다.


"하하, 나는 술을 못 마셔. 이것 봐. 이제 겨우 사이더 두 병째인데, 나는 지금 충분히 기분이 좋아."


에두아드가 멜라니에게 물었다.


"그럼 나랑 내기할래? 네가 이기면 내가 술을 사고, 내가 이기면 네가 술을 사."


멜라니는 "왜 요즘 다들 내게 내기를 하자는 거지? 난 한 번도 내기에서 이긴 적이 없어. 그리고 지금은 돈도 없다고." 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에두아드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멜라니는 내기에 응했다. 에두아드가 제안한 내기는 똑같은 컵 3개와 빳빳한 지폐가 필요한 것이었는데, 컵 두개 위에 종이를 접어 올려 컵 하나가 떨어지지 않게 얹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내기 당사자인 멜라니는 정말로 돈이 없었다. 바텐더인 톰이 가진 건 죄다 꾸깃꾸깃한 지폐뿐이었다. 그래서 여자가 지갑에서 가장 빳빳한 1달러 지폐를 꺼내 주고야 내기가 시작됐다.


적당히 술에 취한 멜라니는 새 지폐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여러 번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이때 지나가던, 이름을 모르는 술 취한 호주 남자가 큰소리로 뭐라 뭐라 말했는데 여자는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정답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여자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으므로, 멜라니가 포기 선언을 하기 전까지는 자기가 해보겠다고 하지 않고, 그렇다고 멜라니에게 힌트를 줘 에두아드를 실망시키지도 않은 채 게임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멜라니가 포기를 선언했을 때, 여자가 조심스럽게 시도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지폐 위에 컵 얹기에 한 번에 성공하고 말았다. 절망하는 멜라니와 실망하는 에두아드에게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에두아드는 웃지도 않은 채 무엇이 미안하냐 되물었다. 여자는 설명할 수 없어서 그냥 웃었다. 여자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실제로 몹시 미안했다.


그렇게 내기가 정리된 후 여자의 양 옆에 앉은 에두아드와 멜라니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격렬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서양 드라마나 영화에서 많이 봐왔던, 한 남녀가 서로에게 반한 순간의 장면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자는, 첫눈에 반하면 노골적으로 주변인과 배경을 다 지워버린 채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격렬히 대화를 나누는 그런 문화권에서 자라지 않은 탓에 그런 상황을 처음 겪었고, 그래서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멜라니와 에두아드가 대화 중간중간 여자를 일별하며 스치듯 동의를 구하는 눈빛을 보냈으므로 도무지 일어날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냥 앉아있자니 백 년 동안의 고독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알 것만 같았다. 어쨌든 늦은 시각이었으므로 결국 둘의 대화는 끝이 났다. 바로 옆에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키가 179cm나 되는 멜라니는 겨우 162cm인 여자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


"그는 참 스윗해."

"응." 여자가 답했다.

"근데, 걔 이름이 뭐라고?" 멜라니가 물었다.

"에두아드래." 여자가 말해줬다.

그날은 만월이었고 둘은 며칠 후 토끼섬으로 함께 여행을 갔다.

비록 혼자 하는 여행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씁쓸한 종류의 고독을 맛보았지만 여자가 얻은 것도 있다. 술 한 잔 하고 싶은데 돈이 없는 날 한 번쯤 써먹어볼 수 있는 괜찮은 내기 하나를 알게 된 것이다. 다만, 에두아드는 멜라니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못하게 하면서도 제한 시간은 두지 않았었는데, 여자는 이겨서 술을 얻어먹는 게 목적이므로 제한 시간을 엄격히 둘 작정이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와서 멜라니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여자는 이제 두어 시간 후면 일출을 볼 수 있을 테니 해가 뜨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도 없는 올리스플레이스의 해먹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흔들리는 나뭇잎과 흐르는 구름들 사이로 달빛이 숨었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잠들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여자는 밤새 달을 보며 해를 기다렸다.



올리스플레이스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상상한 대로 압도적이었다. 슬프게도 여자는 그런 장관을 오롯이 즐기지 못하고 쓸데없이 카메라에 모두 담아보겠다는 욕심을 가진 현대인이었으므로, 백 장도 넘는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고도 그 장관들을 눈으로도 담았다고 자신하는데, 그것은 그곳에서의 일출은 여자가 살던 도시에서의 일출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여자가 그걸 보고 있는 것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유일하게 방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날씨인데, 그날은 하늘에 가득한 구름마저 해만큼은 가리지 않았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혼자 보고 있자니 몇몇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몇몇 이름을 지웠다.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느니, 이제 다시 부를 수 없는 이름이라느니,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다. 여자가 떠올렸다가 지운 이름들은 한때 자주 여행을 함께 다녔지만 아마 에어컨이 없는 데다 공용 욕실엔 항상 도마뱀이 상주하고 벌레가 많은 곳에서 며칠을 보낼 수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녀들은 이제 아이들의 엄마들이었고, 남자들의 아내들이었다. 그렇게 몇 명의 이름을 지우고 나서도 여자는 여전히 몇 명의 이름을 남겨둘 수 있었는데, 그중 누군가와는 꼭 한 번 올리스플레이스에 다시 와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코젯이 나타났다. 코젯은 올리스플레이스에 사는 우아한 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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