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는 여행 <years> #05 - 200409 - 스웨덴 스톡홀름
2004년 8월부터 2005년 2월까지 스웨덴 벡쿼(Vaxjo)라는 남쪽의 작은 도시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다. 9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8월엔 태국 방콕을 거쳐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여행했다. 식비 아끼고 때론 빈병도 모아가며 돈을 모아 9월엔 스웨덴 스톡홀름, 10월엔 스웨덴 칼마르, 11월엔 스웨덴 예테보와 덴마크 코펜하겐, 오덴세를 여행했다. 12월엔 그루브 아르마다의 공연을 보려고 스웨덴 말뫼를 거쳐 영국 런던엘 다녀왔고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한 달 동안의 유럽 여행을 시작했다.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당시의 여행 기록을 싸이월드에 성실하게 남겼다. 그런데 이젠 나 자신조차 더 이상 내 미니홈피를 열어보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그때의 그 여행은 마음에 남아있어 오래오래 들춰봤다. 한국에 돌아와 오랫동안 낯선 나라 여행을 하지 못하는 동안 과거의 여행들을 기억하고 또 기억했다. 아무 날도 아닌 날 자다 깼는데 문득 차가운 기차 안의 온도가 떠오른다거나, 밥을 먹고 있는데 문득 어떤 골목 모퉁이를 막 꺾어들던 순간이 떠오른다거나 하는 식으로 나는 그때의 그 여행을 하고 또 했다.
한 번 지나간 여행이지만 수십 번 수백 번 반복된 여행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의 그 여행기록을 책으로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미 너무 오래된 여행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여행은 이어지고 있으니까,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여행, 11년 전의 그 여행에 대한 이야기도 새로 써서 덧붙여보기로 한 거다. 그게 작년의 일이다. 그때는 11년 전이었다. 하지만 책을 만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해보려고 시작했던 텀블벅 펀딩이 실패했고 이제 다시 일 년이 지나 이젠 12년 전이 돼버렸다.
아쉬운 마음에, 이미 어느 정도 편집해둔 책을 여기에 조금씩 옮겨보려고 한다. 회색 바탕 위의 글과 사진은 여행을 다녀온 직후 싸이월드에 올렸던 글과 사진 그대로이고, 흰 바탕 위의 글과 사진은 작년에 새로 쓰고 다시 찾아 올린 글과 사진이다.
:: 기억하는 여행 <years>
2005년 9월
스웨덴 스톡홀름
유럽의 도시는 어제와 오늘의 도시.
유럽의 어제는 어제대로, 오늘은 오늘대로 서로 많이 닮아 있지만
거기에는 또 오르막이 있고 반짝거리는 물이 눈물 같고 배 속에 잠이 있지.
기울어진 추억, 경사가 있고 각도가 있는 기억으로 남기 좋은
어제와 오늘의 스톡홀름.
일렁이는 꿈을 꿀 것 같아, 오늘 밤은.
그러나 너무 많이 일렁이지는 말아.
일렁이는 것은 내 머리를 간지럽히나,
울렁이는 것은 원하지 않는 것까지 쏟아지게 만드니까.
200409
where are you going
나는 다시 이곳에 와야만 해. 다른 누구도 아닌 너와 함께. 꼭 너와 함께.
내가 구하지 않으면 안 될 용서, 내려놓을 수 없는 짐,
당연히 되돌려주어야 할 너의 스톡홀름.
나는 너에게 스톡홀름의 물들과 구름, 섬, 햇빛을 빚졌어.
그들이 아름다울수록, 그들이 반짝일수록 나는 더 간절히 죄를 짓게 돼.
이렇게까지 잔인하다니, 너, 스톡홀름. 네가 나에게.
오돌토돌한 걸음과 내 눈을 실어 보낸 구름들,
내 고결해야 할 이성을 갉아먹는 세 개의 왕관,
위로 갈수록 마주 보는 감라스탄의 건물, 비싼 거리. 내 혀를 뽑아간 카페.
나는 이제야 진실로 알겠다.
생각을 버리니 사랑이 오더라.
그러나 매번은 힘들어, 생각을 버리기란, 그저 환상만 피해.
환상이 없으니 사랑이 오더라.
그것도 힘들면 그저 나쁠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나쁘게 짐작하니 사랑이 오더라.
조금만 좋아도, 깜짝 놀랄 수 있지,
깜짝 놀라면 진실로 사랑이 온다, 오더라.
200409
안녕, 스톡홀름
그래, 다시 보자 스톡홀름, 안녕.
모래 쓰는 소리 들린다 모래 쓰는 모습 쳐다보고 있을 때보다 더 선명히 모래 쓰는 소리,
들린다.
무거운 첼로 소리 들린다 모래 쓰는 소리 볼 때 더 크게 들린다.
스톡홀름도 그렇게 모래 쓰는 소리처럼 폭포 앞 첼로처럼
주립병원에 누운 그대로의 모습만이 머리에 있는 아무 생각할 수 없는
환자의 말풍선처럼.
바다를 건너지 않아도 갈 수 있는 섬, 배를 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바다.
왕이 아닌 자에게도 씌워주는 왕관.
엑스레이 속에서 더욱 선명한 금속 액세서리
스톡홀름, 어제와 오늘의 도시,
오늘이 어제가 되는 내일 다시 만나자.
또 보자, 스톡홀름 안녕
200409
스톡홀름에서 내가 가장 많이 느꼈던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남자와 나는 스웨덴까지 함께 가고도 정작 그곳의 도시는 여행하지 않았다. 유럽의 입출을 스톡홀름 공항에서 한 남자가 가본 곳이라고는 처음 짐을 맡기러 갔던 대학교 사무실과 집으로 돌아가기 전 들렀던 내 기숙사방 정도가 다였다.
그렇게 남자를 돌려보내고 9월에 스톡홀름을 여행하게 됐는데 그곳은 정말 아름다웠다. 9월이지만 마치 11월 같이 쨍하고 날카롭던 공기, 변덕스러운 날씨가 만들어낸 풍성한 구름, 스웨덴 왕실의 상징인 3개의 크라운, 도시 한 가운데 일렁이던 물들, 과거와 현재를 잇는 얕은 언덕과 골목들.
스톡홀름에서 보내는 시간이 황홀할수록 정작 그곳은 돌아보지 못하고 돌아간 남자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스웨덴에서 한 학기를 보내게 되면 아무래도 이곳저곳 여행할 기회가 많을 것이었기 때문에 거기까지 가서도 스톡홀름은 그저 지나치기만 했던 것 같은데 둘이 같은 마음으로 정한 것인지, 남자가 전적으로 나를 위해 양보한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다녀와서 쓴 글들이 온통 저런 걸 보면 어쨌든 그것은 사랑이었나 보다. 일방적인 양보와 배려도, 미안해하는 마음도, 모두.
그 남자와는 오래전에 헤어졌다. 그런 남자의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하고 있진 않은가 생각하면서도 뺄 수는 없었다. 이제 남자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여행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