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영혼 급류에 씻어내고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6 - 라오스 돈콘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4천 개의 섬 중 작고 낮은 수백 개의 섬쯤은 잠기고도 남을 것 같은 폭우 속에서 잠든 여자가 완전히 일어났을 때 비는 많이 잠잠해져 있었다. 빗소리가 워낙 커서, 아침이 다가올수록 더 깊이 잠들곤 했던 여자로서는 흔치 않게 해 뜰 녘부터 몇 번쯤 눈을 떴다 다시 잠들었는데, 그때까지도 비는 여전히 같은 기세로 내리고 있었다.


그날은 전날 요나쉬가 말해준 '비치'에 가 볼 생각이었으므로, 콘섬(Don Khon)에서 묵지 않는 여행자가 섬에 출입하려면 입장료를 내야 하므로, 여자는 가능하면 아침 일찍 움직일 계획이었다. 다행히 오전 9시쯤에는 비가 많이 잠잠해졌다. 여자는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으러 숙소 바로 앞에 있는 타벤당의 식당으로 갔다. 전날 저녁을 다른 곳에서 먹고 온 여자에게 주인 여자가 서운한 기운을 내비친 데다, 크레이지 게코의 밥은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에 비해 굉장히 뛰어난 맛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자는 아침만이라도 타벤당에서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타벤당의 아침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바게트에 치즈와 채소를 넣은 샌드위치와 커피를 시켰는데, 타벤당의 바게트는 여자가 여행 중 먹어본 것 중 가장 작았다. 약간은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비가 완전히 그치기를 바라며 빵을 씹고 있을 때 타벤당에 묵고 있는 또 다른 손님들이 식당으로 왔다. 어린 아들 둘을 둔 남녀 부부였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으레 그렇듯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탐색이 이어졌다.


폴린과 데니스는 네덜란드인이었는데, 뎃섬에 오기 전엔 가족이 다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라오스 볼라벤 고원을 다녀왔다고 했다. 볼라벤이라면 여자가 뎃섬의 다음 목적지로 삼고 있는 곳이었다. 단 한 번도 타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오토바이를 타게 된 계기를 제공한 곳이었다. 전날의 경험 때문에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혼자 하는 여행의 자유로움보다는 쓸쓸함을 조금 더 크게 느끼고 있었던 여자에게 그들은 다정하게 곁을 내줬다.


글로벌 에너지 기업에서 일한다는 데니스는 볼라벤에서 직접 찍어온 지도를 보여주며 볼라벤 여행에 대해 이런저런 조언을 해줬고, 파트타임 간호사로 일한다는 폴린 역시 다정하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건넸다.


아침의 기분 좋은 만남이 이어지는 동안, 비도 완전히 그쳤다. 여자는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고 짐을 챙겨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건넜다. 폭이 좁은 다리 양쪽으로는 난간이 전혀 없었다. 짧은 거리지만 긴장하며 건너니 매표소가 나왔다. 간판엔 최근에 입도비를 올린 듯 숫자를 수정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enteree_01.png
enteree_02.png
enteree_03.png
enteree_04.png


중간중간 위치한 표지판을 따라 리피폭포를 찾아 들어갔다. 콘섬은 뎃섬보다 인구가 더 적은지 섬 입구 가장자리를 따라 모여 있는 식당이나 숙박업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들판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10분 혹은 20분쯤 길을 따라 들어갔을까, 리피폭포 입구 주차장이 나타났다. 이미 주차돼 있는 몇 대의 자전거와 오토바이 사이에 자전거를 주차하고 여자는 폭포를 따라 걸어내려 갔다. 요나쉬가 알려준 '비치' 방향으로.


waterfall_01.png


여자는 두 해 전 아이슬란드 여행에서 폭포란 폭포는 원 없이 봤다. 세계 3대 폭포라는 데티포스며, 그 장대함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굴포스며, 하루 종일 선명한 무지개가 떠 있던 스코가포스며, 신들의 폭포라는 별명을 가진 고다포스는 물론이고, 달리는 길 곳곳에 이름을 모르는 폭포들이 흔하게 있었다.


지겹도록 봤고 볼 만큼 본 게 폭포라고 생각했는데, 리피 폭포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전날 내린 비로 강물은 엄청나게 불어 있었다. 메콩의 황갈색 강물들이 넓고 낮은 지역을 아주 길게 흐르고 있었다. 짙은 황갈색 강물들이 바위에 부딪쳐 튀어 오를 때마다 새하얀 빛으로 퍼졌다. 폭포수가 흐르는 바위들은 대체로 작고 날씬했다. 마치 동남아 지역의 사람들 같았다.


waterfall_02.png
waterfall_03.png
waterfall_04.png
waterfall_05.png
waterfall_06.png
waterfall_08.png
waterfall_07.png
waterfall_10.png
waterfall_12.png
waterfall_13.png
waterfall_14.png
waterfall_15.png
waterfall_16.png
waterfall_17.png
waterfall_20.png
waterfall_21.png
waterfall_22.png
waterfall_23.png
waterfall_24.png
waterfall_25.png
waterfall_26.png
waterfall_27.png
waterfall_28.png
waterfall_29.png
waterfall_31.png
waterfall_32.png
waterfall_36.png
waterfall_34.png
waterfall_35.png
waterfall_38.png
waterfall_37.png
waterfall_39.png
waterfall_40.png
waterfall_41.png
waterfall_42.png
waterfall_43.png
waterfall_45.png
waterfall_pano_01.png
waterfall_pano_02.png
waterfall_pano_03.png
waterfall_pano_04.png
waterfall_33.png


길게 아래로 흐르는 폭포를 따라 걸어내려 가는 동안 중남미 혹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오지 않았을까 싶은 남자 둘과 할머니, 할아버지, 어린 손녀가 함께 온 듯한 프랑스인 가족들을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저기는 대체 어떻게 간 거지 싶은 폭포의 한 가운데에서 지역주민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낚시를 하고 있는 걸 보았을 뿐이었다.


라오어로 '솜파밋(Somphamit)'라고도 불리는 이름을 가진 리피폭포는 '영혼의 덫(Spirit Trap)'을 뜻했다. 라오스 사람들은 리피폭포의 거센 급류가 나쁜 영혼을 휩쓸어가버린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폭포 안에서 낚시 하던 남자에게는 곳곳에 위험 표지판이 붙은 그 폭포가 이제는 익숙한 생업의 장소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자신의 영혼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어서 그렇게 용감하고 그 한가운데에서 낚시를 하고 있는 걸 지도 몰랐다. 그리고 여자는, 영영 그 안으로 들어가볼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다.


걷는 속도가 느린 데다 너무 자주 멈추고 사진을 찍는 바람에 마침내는 여자 혼자 남았을 때 요나쉬가 말한 'Beach'의 표지판이 나왔다. 'Beach'는 우리말로 하면 '해변'이다. 강변은 보통 'Riverside'라고 하지 않나. 그런데 거기에 있는 건 분명 'Beach'였다. 메콩강은 워낙 거대해 이름만 강이지 바다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 메콩강 위에는 그렇게 사람들이 사는 섬이 떠 있었고, 폭포가 잠잠해지는 곳에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해변(강변이 아니다)이 있었고, 주로 바다에 사는 돌고래도 살았다.


beach_01.png
beach_02.png
beach_03.png
beach_05.png


비치에 도착했을 때 여자는 대체로 차분하던 요나쉬가 비치에 대해서 말할 때만은 왜 그렇게 흥분했나를 알 수 있었다. 먼저 내려가 본 해변에는 곧이어 도착한 젊은 여자들이 소리를 지르며 옷을 벗고 달려 들어가 헤엄을 쳤다. 그 위로는 식당과 바, 그리고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는 해먹들이, 우리나라로 치면 정자같이 생긴 건물 안에 설치돼 있었다.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라 요나쉬가 극찬했던 또 하나인 요리는 맛볼 수 없었지만 맥주를 팔았으므로 여자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여자는 아래가 내려다보이는 가장 위치가 좋은 정자에 짐을 풀고, 가져온 책을 꺼내 해먹에 누웠다. 맥주를 마시고 내려놓고 다시 집어 들고 마시기가 아주 조금 불편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불편함은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만약 여자가 다음 날 섬을 떠날 계획만 아니었다면 여자는 뎃섬에서 콘섬으로 숙소를 옮겨 몇 날 며칠이고 비치를 찾았을 것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왜 그렇게 그런 상황, 예를 들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책 보고 맥주 마시고 내키면 몇 자 끄적이는 그런 상황에 무조건적인 애정과 애정을 넘은 집착을 느끼는 걸까 스스로 생각해봤다. 사람은 때론 자기 스스로에 대해 가장 무지한 법이니까 그게 맞는 답인지는 몰라도 여자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여자는 게으르니까. 게으른 게 본성인데 본성을 거스르며 살아왔으니까.


실제로 여행하고 있지 않을 때 여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노는 시간이나 기간이 길어지면 불안해져서 결국은 뭔가를 시작하고, 시작한 일들에 치이면서 다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됐던 길지 않은 시간을 스스로 걷어차버린 것을 후회하는 삶을 반복해왔다. 그런데 여행 중에는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유명한 것이 있는 곳에 가서 유명한 것을 보지 않아도(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 경우에), 별로 불안하지 않았다.


beach_06.png
beach_04.png


게으른 여자는 오후 나절을 아무렇지 않게 그곳에서 다 보냈다. 배만 고프지 않았다면(그것이 항상 문제다!), 몇 안 되는 사람들마다 조금씩 돌아가고 여자 혼자만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았다면, 여자는 거기서 밤을 새우고 싶었지만 사실 조금은 겁이 났다. 폭포의 가장 깊숙한 안쪽에 있는 셈이었으니까. 더구나 여자에게는 Sunset Side에서 해 지는 모습을 바라보겠다는 또 다른 계획도 있었다.


그래서 해가 지기 전에 책을 접고 짐을 챙겨 비치를 나섰다. 그런데 비치를 나오는 그때, 다른 해먹에 요나쉬와 스벤이 누워 각자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 같았으면 분명 먼저 발견한 여자가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을 테지만 여자는 왠지 그럴 수 없었다. 그냥 짐을 챙겨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ani_02.png
ani_03.png
ani_04.png
scene_01.png
scene_02.png
scene_03.png


저녁은 다리 바로 아래에 있는 식당에서 먹었다. 해 지는 모습을 보기에 가장 좋을 것 같았고, 바로 맞은편으로 여자가 묵고 있던 타벤당도 보여서 왠지 마음이 편했다. 저녁을 먹고 있던 식당에도 역시 손님은 드물었다. 여자가 천천히 밥을 먹고 거기 앉아 사진을 찍는 동안 단 한 명의 여행자만이 밥을 먹고 나갔다.


scene_04.png
scene_05.png


식당에는 식당 여주인과 시어머니, 혹은 어머니로 보이는 노인과 어린 여자아이와 갓난아이와 고양이 세 마리가 있었는데 장사가 그렇게 시원찮아서 그 많은 식구들이 어떻게 먹고살까 걱정이 될 정도로 섬 안은 고요했다.


어미 고양이는 배가 고팠는지 여자가 밥을 먹는 내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 여자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먹고 있던 것 중 고양이가 먹어도 될 것 같은 것들을 골라서 줬는데, 그렇게 어미 고양이가 여자 곁에 붙어 있는 동안 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됐다는 새끼 고양이가 어미 고양이의 젖을 맹렬하게 빨았다. 여자에게 더 이상 나눠줄 것이 남아있지 않았을 때는 어미 고양이도 새끼 고양이가 젖을 물도록 가만있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떠나버렸다.


cat_011.png
cat_021.png
cat_031.png
cat_041.png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여느 날처럼 해는 저물었다. 다리 위로 하루 일과를 마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콘섬에서 놀다 뎃섬으로 돌아가는 여행자들, 뎃섬에서 일하고 콘섬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해지는 다리 위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뛰어노는 아이들. 그중에는 여자보다 늦게 비치에서 나와 뎃섬으로 돌아가는 요나쉬와 스벤의 뒷모습도 있었고, 콘섬에서 저녁을 먹고 뎃섬으로 돌아가는 폴린과 데니스, 댄과 샘도 있었다.


bridge_01.png
ship_01.png
ship_03.png
ship_07.png
p_on_b_02.png
p_on_b_03.png
p_on_b_04.png
p_on_b_05.png
p_on_b_06.png
p_on_b_07.png
p_on_b_08.png
p_on_b_09.png
p_on_b_10.png
p_on_b_11.png
p_on_b_12.png
p_on_b_001.png
bridge_03.png
bridge_04.png
sunset_01.png
sunset_02.png
sunset_03.png
sunset_04.png


그렇게 한참 해지는 걸 구경하고 타벤당으로 돌아가자 폴린 가족이 타벤당 식당에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폴린과 데니스는 여자가 돌아오는 걸 보고 함께 카드놀이를 하지 않겠냐고 권했다. 영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열한 살 댄과 일곱 살 샘과는 오로지 눈빛으로만 인사를 건넸는데, 그 눈웃음이 너무 아름다워 그냥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랑에 빠질 것 같았다.


IMG_4944.JPG
IMG_4946.JPG
IMG_4947.JPG


외국인이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안타깝지만 저마다 다르다. 특히 외국인들을 자주 볼 기회가 없는 어린아이들의 경우 솔직하기 그지없는 시선을 보내곤 했다. 동남아의 유명 관광지에서 이미 한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어린 나이부터 오랫동안 호객을 해온 아이들의 눈빛과 외국인을 보는 게 흔치 않은 시골 아이들의 눈빛이 다르고 백인 아이들이 동양인 여행자를 보는 눈빛이 또 달랐다.


댄과 샘의 눈빛은 순수한 호기심 외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계속해서 흘낏 여자를 훔쳐보다가 여자와 눈이 마주쳐 아이들에게 먼저 웃어주면, 그래도 형이라고 댄은 함께 웃어 보였고, 샘은 부끄러워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폴린, 데니스와 이야기를 해 보니 아이들이 그렇게 사람들을 편견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바라볼 수 있는 아이들로 자랄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폴린과 데니스가 여자에게 함께 카드를 하자고 말했을 때 댄과 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여자를 향해 웃어 보이며 자신들의 자리를 비워 앉았다. 여자는 그 눈빛과 몸짓을 거부할 수 없었다. 댄과 샘이 자러 들어가야 하는 때까지 여자는 그들과 많이 웃었다. 몇 번을 이기고 몇 번을 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정말 오랜만에 아주 많이 웃었던 밤이었다는 것, 지금은 그것만 기억에 남아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메콩강 위 4천 개 섬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