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콩강 위 4천 개 섬 중 하나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5 - 라오스 돈뎃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아침 7시 10분에 씨엠립 숙소를 떠나서 라오스 돈뎃, 그러니까 뎃섬에 도착한 건 오후 6시가 넘어서였다.


씨엠립에서 스퉁트렝까지 약 300km, 스퉁트렝에서 돈뎃까지의 직선거리 약 35km. 비록 그 거리에는 포장도로도, 비포장도로도, 건너와야 할 강도 있었지만 335km를 가는 데 걸린 시간이 11시간이라니 역시 국경을 넘는 일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비록 잘 모르는 여행자지만 나름대로 이 일 저 일 다 겪으며 같이 국경을 넘어서 끝내 강은 함께 건너지 못하고 둑 위에 남겨진 벨기에 남자가 안쓰러웠던 것도 잠시, 선착장에서 돈뎃까지 낮은 보트를 타고 들어가며 여자는 안도했고 만족했다.


보트 밖으로 손을 내밀면 저절로 닿는 그 물은 메콩강이었다. 거기까지 가는 데 하루 종일 걸린 탓에 선착장 방향으로 해가 지고 있어 황토색 강물은 붉었다. 씨판돈은 라오스어로 4,000개의 섬이라는 뜻이다. 4,000개의 섬이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돈뎃이 그중 하나의 섬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곳에 가게 된 여자의 눈높이에 작은 수풀더미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보트에 탄 여자의 팔에 메콩 강물이 튀었다.


후에 여자는 메콩강에 떠 있는 그 작은 수풀더미들 역시 4,000개 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그 점은 여자를 실망시키기보다는 더욱 감동케 했다. 작아도 커도 같은 물에 떠 있으면 그저 또 하나의 섬인 거였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라오어로 'Don'은 '섬'이다. 여자가 머물기로 한 돈뎃(Don Det)은 그러니까 뎃섬이었다. 뎃섬은 콘섬과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다리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그 지점에 '타벤당'이라는 이름의 게스트하우스가 있었는데, 그 섬의 주소는 'Sunrise Side'였다. 다리 건너에 있는 식당의 주소는 'Sunset Side.' 4,000섬이라는 이름 때문에 씨판돈 뎃섬에 가게 된 여자는 'Sunrise Side'라는 주소 때문에 그 숙소를 예약했다. 욕실이 딸린 방갈로와 방갈로 앞에 걸린 해먹과 그 해먹에서 건넛섬인 콘섬이 바로 보인다는 점까지, 여자가 그곳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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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뎃섬에 도착한 건 6시가 넘은 시간이었고, 보트를 탔을 때 지기 시작했던 해는 뎃섬에 도착했을 때 완전히 기울어 있었다. 배에서 함께 내린 스위스인 두 명과 독일인 두 명은 숙소를 예약해두지 않았고 어두웠으므로 섬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에서 묵겠다고 했다. 여자도 지치고 힘들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미 타벤당을 예약해둔 상태였다.


뎃섬은 400명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 섬마을의 길이 잘 포장돼있을 가능성은 적다. 타벤당에 가려면 어두운 비포장도로 위를 또 한 번 캐리어와 함께 걸어야 했다. 그곳에 오래 머문 걸로 보이는 외국인에게 길을 물으니 물을 따라 10분 정도만 걸으면 타벤당이 나올 거라고 했지만, '물을 따라서 가기만 하면 된다'는 그 말이 너무도 아름다워 아무리 늦어도 걸어서 가보려고 했지만 섬은 너무 빨리 어두워졌다. 타벤당까지 오토바이를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오토바이를 타고 가도 무서울 만한 어둠이었다.


하는 수 없이 여자는 걷다가 포기하고 마음에 드는 숙소로 들어갔다. '스마일링 라오'라는 이름을 가진 그곳엔 당연히 빈 방이 있었다. 웃지 않으면 화난 것처럼 보이지만 살짝만 웃어도 너무 다정한 얼굴의 여주인이 있는 곳이었다. 그녀는 여자가 다음날 체크아웃 시간이 너무 이르다고 하니 시간을 늦춰줬고 주방 마감할 시간이 다 됐지만 저녁 주문을 받아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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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바로 가까이에 있던 식당엔 중국인으로 보이는 여행자 두 명, 식구로 보이는 종업원 한 명, 역시 식구로 보이는 마르고 늙은 노인 한 명과 고양이 여러 마리가 있었다. 여자는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볶은 면요리와 비어라오를 주문했다. 라오스에 도착해서 처음 먹는 끼니와 맥주였다. 밥이 나오자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었던 고양이들이 일제히 여자 곁으로 다가왔다.


여자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예약해두고 가지 못한 타벤당이 마음에 걸렸던 것도 잠시, 방콕 팁사마이에서 먹었던 맛에 비견할 만한 팟타이와 처음으로 마시는 비어라오만으로도 그날 밤 모든 근심이 사라졌다. 비록 방 안의 벽은 갈라지고 갈라진 틈으로 벌레들이 다녔지만 모기장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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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스마일링 라오의 안 웃으면 무뚝뚝하기 짝이 없지만 웃기만 하면 누구보다 다정한 여주인에게 작별을 고하고 타벤당을 찾아 나섰다. 날도 밝으니 어디 한 번 걸어볼까 하는 당찬 마음은 그러나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돼서 기가 꺾였다. 어떤 당찬 마음도 꺾어놓는 무더위였다. 어떤 당찬 발걸음도 붙잡는 자갈길이었다. 작긴 해도 든 짐이 적지 않아 무거운 캐리어인데도 굵은 돌들이 박힌 길 위에선 가볍게 튀어올랐다. 결국 여자는 걷기를 포기하고 모퉁이의 한 식당으로 가서 오토바이를 좀 태워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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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고양이 두 마리가 있던 그 식당의 여주인은 기름을 넣고 오겠다며 선불을 요구했다. 그리고 잠시 후 여주인은 오토바이에 기름만 넣은 게 아니라 귀여운 아들까지 실어왔다. 두 명이 앉아도 꽉 차는 오토바이 위에 여주인과 그녀의 아들이 이미 타고 있다면 여자와 여자의 배낭과 여자의 캐리어는 어디에 실어야 할까 난감해하자 여주인이 여자에게 일단 타라고 했다. 그리곤 캐리어를 들어 여자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당황해하는 여자 앞에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오더니 괜찮겠냐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안 괜찮을 게 분명했지만 여자는 습관적으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남자는 길게 세워져 있는 캐리어를 옆으로 눕혀주며 이렇게 가면 좀 나을 거라고 말했다.


스마일링 라오에서 타벤당까지는 오토바이로도 10분 가까이 걸릴 만큼 가깝지 않은 거리였다. 거리상으론 400m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강가를 따라 꼬불꼬불하게 길이 나 있는 데다가 우기여서 흙길은 진흙밭이 돼 있었다. 거기에 커다란 돌부리도 잔뜩 박혀 있어서 걸어 가든 오토바이로 가든 쉽지 않은 길이었다. 콩콩콩콩 어릴 적 스카이콩콩을 연상시킬 만큼 앞으로 가는 것보다 위로 튀어 오르는 횟수가 더 많은 길 위에선 여자의 허벅지 위에 놓인 캐리어도 똑같이 튀어올랐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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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한 길을 달려 타벤당에 도착하자 아주 어려 보이는 임신부가 여자를 맞아줬다. 여자는 전날 늦게 도착한 데다 짐 때문에 오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어렵게 도착한 타벤당은 방도 깔끔했고 위치도 너무 좋았다. 숙소 식당에서 바로 콘섬으로 가는 다리와 콘섬이 마주 보였다. 아침부터 한국이었더라면 이틀 정도 정도는 시간이 있어야 흘렸을 땀을 삽시간에 쏟은 여자는 방을 배정받자마자 역시 잠부터 잤다. 일단 그 섬에서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많지 않았고, 걸어서 섬을 다 돌아본다 해도 두어 시간이면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낮잠 치고 5시간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에어컨이 없는 더운 여름날 오후에 드는 낮잠은 그렇게 사람을 깨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한낮에 땀범벅이 되어 잠들면 이상 어릴 때부터도 그렇게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잠에서 깬 여자는 씻고 오후 산책에 나섰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다시 전날 섬에 도착한 시간이 되어 어둠 속에 갇힐 터였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강가 도로 말고 섬 한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선택해 산책을 나섰다. 아직은 비가 오지 않았지만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여자가 걷고 있는 하늘 위에는 구름이 없었지만, 불과 수십 미터 앞 하늘 위에는 먹구름이 가득해서 걸으면 걸을수록 마치 구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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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섬 한가운데로 난 길을 30분쯤 걷자 다시 선착장에 가까운, 식당과 숙소들이 많이 모여 있는 동네 쪽 길이 나타났다. 여자가 아침에 걷기를 포기하고 오토바이를 빌렸던 바로 그곳이었다. 출출했던 여자는 아침에 봐 둔 크레이지 게코라는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 앉기가 무섭게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곳은 비스듬히 기대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서 여자는 우산이 없었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라오스 특유의 묽은 카레와 맥주를 마시는 동안 비가 잠잠해졌지만 여자는 한동안 더 그곳에서 고양이와 놀거나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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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완전히 그친 후에는 근처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그리고 해 지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보려고 선착장 쪽으로 달렸다. 가는 길에 요나쉬와 스벤을 만났다. 요나쉬와 스벤은 전날 국경을 같이 넘어 뎃섬으로 들어왔던 독일인들로, 요나쉬와는 라오스 국경에서부터 씨판돈 선착장까지 미니밴의 앞좌석에 나란히 앉아 온 덕분에 가장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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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쉬는 이제 겨우 스물셋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가진 돈 전부를 들고 여행을 왔다고 했다. 여자와 만난 그 날 요나쉬에게 남아있던 전 재산은 2,000달러 정도로 그 돈이 다 떨어지는 날까지 동남아 여기저기를 여행한 후 돈이 떨어지면 돌아갈 계획이라고 했다. 금발에 키가 크고 마른 체형이었던 요나쉬는 지금껏 여자가 여행 중에 만났던 여행자들 가운데, 뭐랄까 가장 청순했다. 그 나이 때 동남아로 배낭여행을 온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풍기던 특유의 에너지가 없는 대신(그 특유의 에너지는 여행자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었으므로 여행지에서는 오히려 그들을 다 비슷비슷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어른스러우면서도 사려 깊어 보였다.


길에서 만난 요나쉬와 스벤은 전날 여자보다 훨씬 더 빨리 숙소를 잡고 쉰 덕분인지, 그날 오전에 벌써 콘섬에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요나쉬가 말했다.


"콘섬에 있는 리피폭포를 따라 안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Beach'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 정말 멋져. 밥도 너무 맛있더라. 너도 거기를 꼭 가 봐!"


작은 섬이다 보니 요나쉬와 스벤과는 이후로도 뎃섬과 콘섬에서 몇 번이나 마주쳤는데 여자는 여자보다 무려 열두 살이 어린 요나쉬를 만날 때마다 몹시 반가웠지만 또 그만큼 쑥스러웠다. 스쳐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들과 달리 요나쉬와 좀 더 친해지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여자는 그런 생각이 드는 사람일수록 더 도망가는 아주 촌스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몇 번이나 더 마주쳤지만 그저 반갑게 인사만 하고 쿨하게 가던 길을 가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다시 타벤당으로 돌아갈 땐 길이 다시 완전한 어둠에 뒤덮인 후였다. 여자의 자전거는 아침에 탔던 오토바이보다 훨씬 더 콩콩거렸다. 몸을 달달달 떨면서 천천히 페달을 밟던 여자는 두어 번쯤 진흙길에서 아슬아슬한 순간을 맞닥뜨린 끝에 결국 한 번 진흙밭에 처박혔다.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던 길이 왠지 쓸쓸했는데 그렇게 넘어지기까지 하고 난 후로는 더 이상 자전거에 오를 용기가 나지 않아 남은 길은 자전거를 밀며 걸었다.


숙소에 돌아가선 혼자 비어라오를 시켜놓고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 의기소침해져서 혼자 하는 여행의 자유로움보다는 쓸쓸함을 더 곱씹고 있자니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여자는 방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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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서 세상의 모든 소음을 다 집어삼킬 듯한 엄청난 소음을 한참 동안 듣고 또 들었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내는 빗속에 있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의 폭우였다. 낮에 충분히 잔 여자는 웬만해선 잠들고 싶지 않았지만, 절대 순순히 잠잠해지지 않겠다는 듯한 비의 기세에 꺾인 여자는 다시 그렇게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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