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7 - 씨판돈에서 팍세로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돈뎃에서의 마지막 밤을 따뜻하게 보내고 여자는 다음날 아침 섬을 떠났다. 볼라벤 고원 투어는 보통 라오스 제2의 도시인 팍세(Paske)를 기점으로 하는데, 씨판돈에서 팍세로 가는 버스는 하루에 한 번 뿐이었다. 섬에서 나가는 배도 하루 한 번 뿐이었다.
일찌감치 일어나 일출을 보고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런데 여자를 데리러 오기로 한 오토바이가 오지 않았다. 오겠지 하며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정말 아슬아슬한 시간이 돼버렸다. 배 시간에 맞춰 선착장에 나가지 않으면 배를 놓칠 텐데, 그렇다고 무작정 캐리어를 끌고 걸어서 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터였다.
팍세로 가기 위한 배표와 버스표는 자전거를 빌린 곳에서 예매했었다. 타벤당 주인 여자에게 사정을 설명했더니 그 여행사에 전화를 걸어줬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남자는 여자가 자전거를 빌릴 때 만났던 젊은 남자가 아니었다. 그 젊은 남자는 자전거를 빌릴 때 분명 숙소에 자전거를 두면 어딘지 아니까 자기네들이 자전거를 가져가겠다고 했는데, 전화를 받은 남자는 자전거부터 반납하지 않으면 픽업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여자는 캐리어를 실은 채로는 자전거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건 누구라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일단 자전거를 반납하고 다시 걸어서 숙소에 돌아와 픽업 오토바이를 타고 가야 했는데 그러기에는 역시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은 여자가 짐을 남겨두고 일단 자전거를 반납하면, 여행사에서 캐리어를 싣고 여행사에서 여자를 만나 선착장까지 태워주겠다는 거였다.
그 얘기를 들은 폴린은 걱정했다. 짐을 여기에 이렇게 두고 가도 되겠느냐, 그들의 말을 정말 믿어도 되는 거냐, 여자에게 물었다. 하지만 여자에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 캐리어를 두고 배낭만 메고서 자전거를 타고 여행사로 갔는데, 여행사로 가는 길에 마주칠 거라 생각했던 오토바이는 볼 수 없었다. 말할 수 없이 불안했지만 계속 페달을 밟아 앞으로 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10분~15분쯤 후 여행사에 도착해보니, 이미 젊은 남자 직원이 타벤당에서 여자의 캐리어를 가져다 두고 여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빠른 길로 가서 짐을 챙겨 온 모양이었다. 여자와 캐리어를 모두 실은 오토바이는 배가 떠나기로 돼 있는 시간 안에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에는 이미 많은 여행자들이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뎃섬에 함께 들어온 엘리나와 그 친구도 있었다. 요나쉬와 스벤은 그 섬에서 하루 더 묵을 거라고 그들이 전해줬다. 배는 제 시간에 오지 않았다. 앉아서 기다리며 섬에서 보낸 시간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엘리나 무리는 섬에서 돌고래 투어를 했고 실제로 돌고래를 봤다고 했다. 여자는 그 시기엔 돌고래를 볼 가능성이 낮다고 해서 포기했던 일인데 돌고래를 보다니 부러웠다. 그것 때문에 하루 더 머물러야 하나 싶을 정도였는데, 그때 배가 도착했다.
순서대로 표를 보여주고 배를 탔는데, 여자의 표를 본 남자는 배를 못 타게 했다. 대신 옆에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이유를 물었지만 역시 명쾌한 답은 듣지 못했다. 여자처럼 배를 못 탄 여행자들과 배에 탄 여행자들이 표를 비교해보니 표의 색깔이 달랐다. 분명 여자는 정당한 값을 치르고 표를 샀으니 배를 못 탈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또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는 게 여행이라 여자는 또 불안했다. 다른 색 표를 가진 여행자들이 모두 배에 탄 후 빈자리가 있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남겨진 여행자들도 배에 오를 수 있었다.
표 색깔은 배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됐다. 똑같이 팍세로 가는 건데도 여자의 표는 미니밴, 다른 색 표는 대형버스용이었던 모양이다. 이번엔 여자가 가진 표 색깔이 유리했다. 대형버스는 정차역이 많아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미니밴은 직행이라 훨씬 빠르고 차 상태 역시 더 좋았다.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머무는 순간은 항상 좋고, 떠나는 순간은 항상 불안하고 조금은 힘들었다. 마침내 미니밴을 타기까지 오전 내내 긴장의 연속이었던 여자는 미니밴이 출발하기 전 꼭 화장실에 들러야만 했다. 하지만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밴이 출발해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했다. 여자는 옆에 앉은 여행자에게 잠시 화장실에 갔다 올 테니 가방을 부탁하고 미니밴에서 다급히 내렸다. 그런데 여자에게 가방을 부탁받은 그 여행자도 함께 내리는 게 아닌가. 실은 자신도 가고 싶었는데 불안해서 못 갔다며, 차에 남아 있는 친구가 있으니 아마 자신들을 두고 미니밴이 출발해버리지는 못할 거라며. 그녀의 이름은 테스, 차에 남은 친구의 이름은 마리케였다.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미니밴은 출발했다. 테스와 마리케는 뎃섬 선착장에서 셀리나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었던, 셀리나 무리와 함께 돌고래 투어를 다녀왔다던 바로 그 여행자들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테스는 책을 꺼내 스도쿠를 했고, 마리케는 전자책 뷰어를 꺼내 책을 읽었다. 여자는 울렁이는 차 안에서 책을 읽을 수 없어 잠시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는데 스도쿠를 풀던 테스가 말을 걸어왔다.
수순대로 여자와 테스는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부터 이야기했다. 테스와 마리케는 네덜란드인이었다. 원래부터 작은 우연에도 큰 의미가 있다고 믿어왔던 여자로서는, 이번 여행 동안 네덜란드인들과의 인연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캄폿에서 친하게 지냈던 멜라니, 뎃섬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의지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폴린과 데니스, 댄과 샘에 이어 만난 이들이 또 네덜란드인이라니.
이후 여자는 한국에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테스, 마리케와 함께 보내게 되는데 한참 후에야 테스가 에프엑스를 좋아하고,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어 따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나름의 ‘지한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테스, 마리케와 여자가 계획하고 있던 이후의 일정이 거의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들도 역시 라오스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여행할 예정인데 팍세에는 볼라벤 투어 때문에 가고 있는 거였다. 하지만 테스와 마리케는 단 한 번도 오토바이를 타 본 경험이 없었다. 여자의 라이딩 경험이 비록 캄폿에서 며칠, 바탐방에서 하루뿐이었지만 여자는 그들도 금방 배울 수 있다고 격려했다. 더구나 여자는 캄보디아-라오스 국경을 넘을 때 호주에서 온 여행자들로부터 외국인 여행자들이 오토바이를 빌리기 좋은 대여소도 추천을 받아둔 상태였다.
미니밴이 팍세에 도착하자 테스가 여자에게 물었다.
“넌 숙소를 예약해뒀어?”
“아니. 원래 예약 같은 걸 잘 안 해.”
여자가 웃으며 대답하자 마리케가 물었다.
“우리도 그런데. 그럼 숙소 같이 한 번 찾아볼까? 툭툭비도 같이 내서 돈도 아끼고.”
“좋지!”
여자와 테스, 마리케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시작된 여행이 여자가 라오스를 떠나는 날까지 이어질지는 몰랐지만.
딱 봐도 여행자들처럼 보이는 행색으로 어디에서 자면 좋을까 론니플래닛을 뒤지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툭툭 기사가 다가왔다. 여자는 괜찮은 숙소 또한 호주 여행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둔 터였는데, 툭툭 기사에게 위치를 묻자 굉장히 멀다고 했다. 기사의 말밖에 믿을 구석이 없었던 여자와 무리는 다른 숙소를 골라 위치를 물었다.
“거긴 10분이면 가요.”
어차피 하룻밤 묵고 아침 일찍 볼라벤 고원으로 갈 계획이었으니까, 세 사람은 10분이면 간다는 말에 바로 가격을 흥정하고 툭툭에 올라탔다. 하지만 툭툭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2분 후에 여자들에게 내리라고 했다. 실제로는 툭툭을 탈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였던 것이다.
뭐 어쩌겠냐는 마음으로 약속한 툭툭 요금을 내고 여자들은 방을 잡았다. 여자는 싱글, 테스와 마리케는 더블로. 짐을 풀고 각자 그동안 하지 못한 빨래를 모아 맡긴 후 툭툭으로 2분 걸렸던 그 거리를 다시 걸어 나왔다. 그리고 터미널 맞은편에 있던 인도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마리케는 채식주의자이긴 했지만 세 사람은 식성이 굉장히 비슷했다.
팍세에서 유명한 인도 식당에서 각종 카레들을 시켜 나눠먹은 세 사람은 해가 남아 있는 동안 팍세 시내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러는 동안 국경을 함께 건너며 볼라벤 투어에 대해 여자에게 이런저런 정보를 줬던 호주인 무리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뎃섬에 가지 않고 바로 볼라벤 고원으로 갔기 때문에 그날 이미 3일간의 투어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땠어?”
여자가 기대하며 물었다.
“엄청 좋아. 고원이라 여기보다 훨씬 시원하고, 도로도 한산해서 라이딩하기에 너무 좋아.”
“시원한 게 웬 말이니. 너희도 준비 단단히 해서 가는 게 좋을 거야. 둘째 날 정상에 있을 때 정말 엄청나게 비가 왔어. 가방에 방수천 씌우고 우비를 2개씩 겹쳐 입었는데도 춥더라.”
“우리 완전 오토바이 초본데 괜찮을까? 심지어 이 둘은 아직 한 번도 안 타봤대.”
“일단 삼일 정도로 넉넉하게 잡고 올라가되,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다시 돌아오는 것도 방법이야. 내가 추천했던 미스노이에서 오토바이를 빌리면, 약속한 일정보다 더 빨리 돌아오거나 더 늦게 돌아와도 괜찮거든. 여권만 맡기고 가면, 더 빨리 돌아오면 돈을 돌려줘. 물론 갔는데 너무 좋아서 더 있다 오더라도 반납하면서 그만큼 돈을 더 내면 되고.”
“2박 3일로 가면 첫날엔 탓로(Tad Lo)라는 마을에서 묵게 될 텐데, 거기 가면 꼭 팔라메이(Palamei) 게스트하우스에 방이 있나 봐. 숙박비가 인당 겨우 20,000낍 정도야."
방금 볼라벤 고원에서 돌아온 여행자들의 생생한 조언을 듣고 여자들은 산책 삼아 우비를 사러 시장에 갔다. 팍세는 대도시다. 그래선지 시장에 있는 백화점이 너무 현대적이라 여자들은 금세 흥미를 잃었다.
"근데, 나는 유적지나 유명 관광지 이런 데 별로 관심이 없어. 혹시 너흰 저기 사원에 가보고 싶어?"
여자가 물었다. 그랬더니 테스와 마리케가 소꿉친구 아니랄까 봐 거의 동시에 외쳤다.
"아니, 우리도 그래!"
"신기하다. 이렇게 만난 게."
우비가 없었던 마리케가 폭우에도 거뜬할 것 같은 우비를 산 후에 여자들은 근처 서점에서 엽서를 샀다.
그리곤 가는 길에 봐 둔 모퉁이 카페로 갔다. 가기 전에 여자가 물었다.
"오는 길에 맬리사 커피(Malisa Coffee)라는 데가 있던데 거기 가서 시원한 거나 마실래?"
"어? 나도 아까 오는 길에 봐 뒀는데!"
"그래, 거기 가자. 가서 엽서도 쓰고."
에어컨도 없는 야외라 앉아서 시원한 커피를 마신다는 것만 빼면 그냥 길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자신의 나라로 보낼 엽서를 쓰고 있는 마리케와 테스를 보며 몇 모금만에 사라질 커피를 홀짝이는 것으로도 좋았다. 팍세에서 기대했던 일이 딱 그 정도였기 때문이다.
카페를 나와 볼링을 치러 갈까 어쩔까 망설이던 여자들은 다음날 오직 오토바이에 의지해 길을 떠나야 하니 조금 일찍 쉬러 들어가는 편이 좋겠다는 데 합의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날 여자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가려웠던 눈이 이날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려웠다. 하도 비벼서 육안으로 봐도 눈알이 빨갛게 충혈돼 있었는데, 강렬한 햇빛 아래에선 그나마 살균효과가 있었던 건지 참을만하다가 방으로 돌아간 순간 눈알을 뽑아버리고 싶기에 이르렀다.
약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여자는 다른 여직원들과 카드게임을 하며 놀고 있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을 찾아갔다.
"나 눈이 너무 가려워요. 아직 열려 있는 약국이 있을까요?"
"안 그래도 너 체크인할 때 눈이 빨개서 약국에 가보라고 하려고 했었어. 내가 길을 설명해 주면 찾아갈 수 있겠어?"
설명을 들어보니 약국은 멀지 않은 것 같았다. 밤엔 햇볕도 없으니 공기도 선선하니 걸을 만했다.
"그런데, 알레르기 결막염은 라오스어로 뭐예요?"
여자는 '결막염'이 영어로 뭔지 미리 찾아놓은 터였다. 물론, 라오어로도 찾아서 캡처해뒀지만 그래도 어떻게 소리 내는지 알고 약국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그때 다른 판단을 했다.
"그러지 말고, 태워줄 테니 내 오토바이로 같이 가자. 가서 내가 증상을 설명하고 약 사는 걸 도와줄게."
"나야 고맙지만,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요?"
여행하면서 여자는 점점 현지인들에게 신세 지는 일에 아무렇지 않은 뻔뻔한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여주인의 뒷자리에 앉아 낮에 테스, 마리케와 함께 걸었던 익숙한 골목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문 열린 약국이 보였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약국 앞엔 사람이 많았다. 여자 대신 여자의 증상을 설명하고 먹는 약과 넣는 안약을 받은 여주인은 여자에게 친절하게 복용법과 사용법까지 설명해줬다.
"근데 밥은 언제 먹었어?"
"아까 숙소 도착해서 바로 먹고 안 먹었는데..."
"그럼, 간단하게 뭐라도 먹고 약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내가 가는 길에 있는 맛있는 식당에 내려줄 테니까 밥을 먹고 약을 먹어. 멀지 않으니까 먹고 나선 혼자 걸어서 돌아올 수 있지?"
여주인이 내려준 식당은 그 지역의 맛집이었다. 늦은 시각이었는데도 야외 테이블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쨌든 그렇게 여자는 미리 조사하지 않고도 짧은 체류 기간 동안 지역 맛집까지 두루 섭렵했다.
안약을 넣고, 밥을 먹고, 약까지 먹고 나자 다시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다. 생각으로나마 뽑아버리고 싶었던 눈알로 밤의 골목들을 살피며 숙소까지 걸었다. 비록 갑자기 약국에 가게 될지 몰라 거의 잠옷 차림이었지만 부끄럽지 않게 거리엔 인적이 드물었다.
그날 밤 여자는 개운해진 눈으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예약해둔 비행기표를 취소하고 출국일을 사흘 후로 미뤘다. 취소 수수료를 물고 뒤늦게 표를 새로 끊었는데도 처음 표보다 3만 원 정도 더 저렴했다. 다음날 아침 만났을 때 어쩐지 깊이 잘 수 없었다고 말한 테스, 마리케와 달리 여자는 그날 밤 아주 깊은 숙면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