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면서 햇빛 샤워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8 - 볼라벤 고원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팍세에서 하룻밤을 자고 여자와 테스와 마리케는 미스 노이로 갔다. 하지만 미스 노이에는 더 이상 남아있는 전자동 오토바이가 없었다. 테스와 마리케는 평생 한 번도 오토바이를 몰아본 적이 없었고 여자는 캄보디아 캄폿과 바탐방에서 며칠 동안 오토바이를 타긴 했어도 그건 전자동 오토바이였다. 오른손으로 잡은 핸들을 바깥쪽으로 세게 감을수록 속도가 올라가고 양쪽 핸들 아래에 브레이크가 있다는 정도만 알면 누구나 탈 수 있는. 좌우 브레이크는 각각 앞뒷바퀴에 제동을 거는데, 앞바퀴에 먼저 제동을 걸면 사고 위험이 있으니 브레이크는 반드시 뒷바퀴 쪽을 먼저 잡으라는 정도가 처음 전자동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에게 알려주는 기본의 전부일 정도로 조작이 간단했다. 하지만 반자동 오토바이는 기어를 따로 조정해야 했다.


미스 노이에서 오토바이를 빌리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전날 예약도 해두지 않았던 여자들은 옆 가게로 갔다. 셋 중 누구 하나 미리 예약해두자고 하지 않았던 걸 보면, 결국 비슷한 사람끼리 만나 어울리게 마련이라는 친구 사귀기의 논리는 국경도 뛰어넘는 보편적 진리였던 모양이다. 미스 노이에서 오토바이를 빌릴 수 없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세 여자는 모두 "그래? 그럼 옆 가게로 가볼까?"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다.


옆 가게엔 그러나, 전날 만났던 영어 잘 하는 남자 주인이 없었다. 십 대로 보이는 여자아이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으므로 여자들은 그 남자가 언제쯤 오는지, 오긴 오는지 등 아주 간단한 정보조차 얻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여자들이 필요로 했던 바로 그 정보를 말했겠지만 여자들은 결국 그것을 해석해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사실 그런 일은 같은 언어를 쓰는 경우에도 종종 발생했기 때문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결국 여자들은 다시 그 옆 호텔로 갔다. 대여 가격이 제일 비쌌지만 서로의 말을 해석할 수 있는 직원이 안내를 해줬다. 누구든 드나들 수 있는 호텔 안내데스크 맞은편 화장실 옆이긴 했지만 짐도 맡겨둘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무리 까다로운 사람도 더 이상 재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세 여자는 까다로운 성격들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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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 계약서를 작성한 후 오토바이 한 대씩, 눈으로 봐도 속이 축축한 헬멧 하나씩을 받아 들기까지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크게 까다롭지도 않고 동남아 특유의 눅눅함에도 적응한 여자였지만 그 속에 머리를 넣는 것이 망설여지는 그런 헬멧을 손에 들고 오토바이 조작법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끝나면 그 헬멧을 머리에 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출발을 앞두고도 차마 그것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금방 감은 머리 위에 수천 명의 땀을 모아 만든 증기 캡을 쓰는 기분이었으니까.


"다른 헬멧은 없나요?"


직원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을 뿐인데, 여자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헬멧이 있지만 그 헬멧과 다르지 않았겠지. 여자는 그 헬멧을 쓸 수 있으면 당분간 못 할 일은 없을 거라는 각오로 드디어 헬멧을 쓰고 버클을 조였다. 오토바이를 타 본 적이 없으므로, 그런 헬멧은 써 본 적이 더더욱 없을 테스와 마리케도 함께. 아마 태어나서 처음 몰아보는 오토바이를 약 3분 정도의 조작 설명 후에 타야 하는 긴장감이 그런 상태의 헬멧에는 크게 상관하지 않게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나마 몇 번 더 타봤다고, 여자가 대열의 가장 뒤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여자들의 오토바이 일주가 시작됐다. 처음엔 테스와 마리케 모두 시속 20km/h를 넘기지 못했다. 팍세는 라오스 제2의 도시였다. 도심에는 차도 오토바이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대부분의 차와 오토바이가 알아서 여자들을 피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처음 얼마간은 오직 직진만이 여자들의 일이었다. 제일 처음 보이는 주유소에서 기름을 채우고 여자들은 미세하게 속도를 높여갔다.


짙은 갈색머리 백인 여자와 금발머리 백인 여자, 검은 머리의 황인 여자 셋이 나란히 오토바이를 타고 도로가를 달리는 모습은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샀다. 조합 때문인지, 속도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삼십 분쯤 달린 후 첫 번째 갈림길을 맞이했다. 시내를 벗어난 지 꽤 지났을 때였다. 출발 후 줄곧 20~30km/h의 속도를 유지했으니 10~15킬로미터 만에 시내를 완전히 벗어나게 된 셈이었다. 평지였던 길들이 왠지 조금씩 오르막길로 변해가는 듯한 지점이기도 했다. 여자들은 지도에서 본 대로 그즈음이 여자들이 맞이할 첫 번째 갈림길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제일 앞에서 달리던 마리케가 깜빡이를 켜고 멈춰 섰다. 그다음엔 테스가, 그다음엔 여자가 신호에 따라 속도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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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도 가지고 있었고, 대략적인 길 안내도 받은 후 출발했지만 지도의 길과 설명으로 들은 길, 그리고 실제의 길은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았다. 지도는 길의 모양과 주요 건물을 표시하는 그림이고, 설명은 설명하는 사람의 경험에 기반한 생략과 강조의 결과지만, 여자들이 멈춰 선 그 길은 그림으로 다 그려지지 않고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차와 오토바이, 그리고 사람들이 세 개의 갈래길 중 하나를 거침없이 선택해서 거침없이 사라지는 걸 한동안 지켜봤지만 여자들은 자신들의 길을 쉽게 선택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묻기로 했다. 하지만 시내에서 십 킬로미터 정도만 벗어나도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다. 그럴 때는 문장이 필요 없다. 핵심 단어, 길을 물을 경우엔 지명 하나만을 반복해 말하면서, 그 여러 번의 미묘하게 다른 발음과 억양 중에 현지인의 그것과 가장 흡사한 것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탓로."

"땃로."

"땃로오?"

"땃러~"

"탇러어?"


여자는 테스와 마리케보다 영어 실력이 못한 대신 현지어를 가장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이후에도 현지인에게 길 묻기는 쭉 여자의 몫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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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갈림길에서 무사히 길을 찾은 후엔 한참을 망설임 없이 달렸다. 도시에서 멀어지고 고원에 가까워질수록 길과 풍경은 눈에 띄게 단순해졌다. 도시에는 수백만 가지의 요소들이 있고, 그 속엔 또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일개 인간이 그 복잡다단한 공간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굉장히 낮다. 굉장히 미미한 소수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원에 오르니 여자들을 에워싼 요소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조금은 1에 가까운 소수의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고원은 조금만 시간과 성의가 있어도 그 공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씩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넓었다. 수백만 중의 하나인 삶을 살아왔던 여자들은, 수백 중의 하나가 됐다. 고원에서 여자들은 이전보다 더 큰 소수의 존재가 됐고 도시 속을 여행할 때보다 더 진귀한 구경거리가 됐다.


덕분에 여자는 상당한 용기를 내야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도중에 핸들을 잡은 두 손 중 하나를 핸들에서 떼는 일은 평소 균형 잡기를 어렵게 느껴왔던 여자에게 상당한 용기를 요구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여자들을 향해 끝없이 손 흔드는 길 위의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손 흔드는 사람에게 웃어주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는데, 여자의 미소는 충분히 크고 명확하지 않았다. 미소를 지었다고 생각했던 찰나에 찍힌 사진들 대부분에서 여자는 씁쓸해 보이거나 냉소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여자의 미소는 해맑게 손 흔드는 사람들에게 거의 전달되기 않거나 잘못 전달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2박 3일의 볼라벤 고원 투어가 끝날 때쯤엔 한 손을 들어 흔드는 것 정도는 별로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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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원의 길들은 초행자들에게도 친절하기 그지없었다. 감히 오토바이 초보가 여기저기 한 눈을 팔아도 길을 잃거나 쉽게 넘어지거나 할 일 없는 길이었다. 거기다 한참 후에 도착하게 될 저 멀리까지도 미리 보여주니까 불안할 일도 없었다. 때로 경사나 커브가 심해 보이는 길을 예고한 경우라도, 잠시 후 막상 거기를 지나 보면 멀리서 보며 예상한 만큼의 경사나 커브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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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운전자들은 뒤에서 여자들을 앞지르게 될 경우 반드시 경적을 울려서 알려줬다. 경적 소리가 울려서 사이드미러로 뒤를 확인하고 나면, 차나 오토바이들이 여자들을 얼른 지나쳐 갔다. 이번 여행에서 오토바이를 직접 운전해보기 전에 여자는 동남아 사람들이 성격이 급하고 괴팍하다고 생각했었다. 차들과, 차보다 더 많은 오토바이들, 툭툭들이 중앙선이 무색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운전하면서 경적을 너무 많이 울려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직접 운전을 해보니 그건 성질 급하고 괴팍한 사람들이 너도나도 먼저 가겠다는 뜻으로 울려대는 게 아니었다. 무질서 속에서 그나마 질서를 찾아보려는, 갑작스러운 방향 전환이나 차선 변경, 속도 변화 등으로 생길 수 있는 사고를 최대한 막아보려는 그들만의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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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벤 고원의 모든 길과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 그 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그곳을 찾은 세 여자들을 그렇게 품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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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라벤 고원은 높은 고도와 서늘한 기후 때문에 커피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여자들은 미스터 비엥(Mr. Vieng)의 프레시 커피(Fresh Coffee)라는 간판을 발견할 때까지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두세 시간 정도 달렸던 것 같다. 길이 예뻐서 서고, 폭포 표지판이 보여서 서고, 배가 고파서 서기를 반복하다 점심시간을 넘겨서야 프레시 커피 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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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조금 더 들어가 보니 그곳엔 여자들을 앞서간 여행자 몇 명과 그전에 들렀던 폭포에서 수영을 했던 남자와 그 남자의 동행 등 몇이 한 테이블에 앉아서 이미 식사를 하고 있었다. 미스터 비엥의 프레시 커피는 기본적으로 커피와 원두를 팔고 숙박을 제공하는 곳이지만, 간단한 쌀국수 정도는 요깃거리로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허기가 져 있었던 여자들도 칼국수와 커피를 주문했다.


서양인 두 명과 동양인 한 명이 다니는 게 흔하다면 흔하지만 또 드물다면 드문 일이기도 하니 여행자들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너희 셋은 원래 친구야? 어떻게 셋이서 같이 다녀?"

"여행하다 우연히 만났는데, 어쩌보다 보니 이렇게 같이 여행하게 됐네."


이런 대화는 이후 여자가 라오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가장 많이 반복됐던 것이기도 했다. 여행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세 그릇의 쌀국수가 도착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미스터 비엥의 쌀국수는, 그곳의 상호를 'Fresh Coffee' 대신 'Great Rice Noodle'로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만큼 훌륭했다. 적당히 삶은 면과 진하게 우린 육수, 잘게 썬 파와 큼직하게 썬 양배추, 잘 익은 소고기와 향 강한 고수잎이 모두 어느 하나라도 빠졌다면 서운했을 정도로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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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아라비카 원두와 로부스타 원두 100그램씩을 사서 첫날 머물 탓로(Tad Lo)까지는 훨씬 더 여유롭게 달렸다. 하지만 너무 여유를 부린 걸까. 여자들은 탓로를 사십 킬로미터나 지나쳐간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들의 느린 속도를 감안해도 이미 도착했어야 할 마을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다시 길을 물어 사십 킬로미터를 되돌아가야 했고 돌아가는 데에만 꼬박 한 시간이 걸렸다. 결과적으로 예정보다 두 시간이나 늦게 마을에 도착한 거였다.


탓로의 입구는 보통의 마을 입구들이 갖췄을 법한 어떤 요건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표지판도 없었고 가시거리에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았다. 길을 되돌아가던 여자들이 그 입구 부근을 지날 때 누가 봐도 여행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꺾어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 길 안에 마을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한 곳이었다. 다른 여행자들 덕분에 두 번은 지나치지 않았지만,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호주 청년들이 추천해준 숙소 팔라메이에는 빈 방이 남아있지 않았다.


생애 첫 라이딩 치고는 꽤 먼 거리ㅡ2박 3일 동안 달릴 거리는 총 백팔십 킬로미터 정도, 그날 계획된 라이딩 거리는 그중 팔십 킬로미터였는데, 거기에 팔십 킬로미터를 또 추가로 달렸으니 하루에만 전체 목표 거리에 육박하는 거리를 달린 셈이었다ㅡ를 달린 후라, 세 여자는 조금 지쳐 있었다.


다른 대안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들은 팔라메이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빈 방이 있는 숙소를 찾기 시작했는데, 세 사람이 함께 묵을 만큼의 방이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비수기라 여행자가 많지 않았지만 그만큼 숙박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던 거다. 피로는 세 여자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빈 방이 있다고 말한 첫 번째 숙소를 선택하게 했다. 그곳은 '다행히 빈 방이 남아있는' 정도가 아니라, '희한하리만치 모든 방이 비어 있는 상태'였음에도 여자들은 의심 없이 짐을 풀었다.


일단 그날 밤 묵을 숙소를 구했고 오토바이에서도 무사히 내려왔다는 안도감에 여자들은 산책할 수 있을 정도의 기력을 되찾았다. 마을 안에 있는 폭포도 구경하고, 마치 개처럼 돌아다니던 돼지도 예뻐해 주고, 근처 카페에 가서 커피와 맥주도 마셨다. 첫 번째 고원 라이딩 동안 한껏 긴장했던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었다. 테스와 마리케는 주스로, 여자는 당연히 맥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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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실 것들을 마시면서 여자들은 별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보통 여행하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는 긴 시간 함께 하지 않는 이상 서로 하는 이야기가 비슷비슷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테스, 마리케와는 원래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들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시시껄렁한 농담들, 그리고 서로 말없이 앉아 있는 침묵의 시간까지도 자연스러웠다.


서로 비슷한 구석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여행의 긴장을 풀어준다. 긴장이 풀리면 배가 고파오게 돼 있으므로 여자 셋은 거의 동시에 허기를 느꼈다. 비록 팔라메이에서 묵지는 못하지만, 밥은 그곳에서 먹기로 했다. 팔라메이 게스트하우스에서 식사를 판매하는 방식은 특이했다. 정해진 메뉴를 주문받지 않고, 손님들이 직접 다 함께 요리를 만들어 나눠 먹도록 했다. 메뉴와 재료를 정해주고 어떻게 만드는지 시범도 보여줬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따라서 만들면 됐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여행자들은 프랑스에서 온 무리들, 혼자 여행하고 있다는 미국인 남자와 호주 출신의 십 대 커플까지 다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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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저녁 여자들은 이후의 여행까지 통틀어 가장 다양하고 푸짐한 음식들을 한꺼번에 맛보고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음식도 푸짐하고 사람도 많으니 저녁 시간이 길어졌다. 남들보다 더 멀리까지, 다음날 갈 길까지 미리 다녀온 온 여자 셋이 먼저 자리를 뜰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피곤하고 배부른 몸으로 숙소에 돌아온 여자들은, 안타깝게도 그곳에선 그날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자는 공용 욕실에서 모든 옷을 벗은 후에야 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마리케는 화장실 변기에 있는 더러운 것이 아무리 물을 내려도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런 곳에선 씻을 수 없었다. 씻을 수 없는 곳에선 잘 수 없었다. 씻지 않고 잠들면 그날 하루의 모든 피로가 몸 안에 흡수돼버려서 다음날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봐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자들이 아직 숙박비를 지불하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므로, 세 여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여자가 결단을 내렸다.


"우리, 다른 숙소 찾아보자. 일단 빈 방이 있는지 확인하고 다시 여기 와서 짐을 가져가는 게 어때."


테스가 물었다.


"여기 주인한테는 뭐라고 하지?"

"뭐라고 하긴. 물도 안 나오고 화장실 변기도 고장 났으니까 여기선 못 잔다고 해야지."


테스와 마리케를 안심시킨 후 새 방을 찾아 나섰다. 이미 늦은 밤이라 대부분의 숙소는 불이 꺼져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몇 번을 생각해도 처음 잡은 숙소에서는 잘 수 없었기에 몇 군데 더 찾아다니며 불 꺼진 건물에서 소곤소곤 사람들을 불러냈다. 다행히도 너무 많이 헤매지 않고 빈 방을 찾을 수 있었다.


"마침 트리플 룸 딱 하나가 남아 있어. 더블 침대 하나랑 싱글 침대 하나 있는 방."


그날은 여자들이 만나 함께 여행하기 시작한 두 번째 날이었다. 함께 여행했지만 방은 여자 하나, 테스와 마리케 하나, 이런 식으로 따로 잡았던 터였다. 여자는 잠시 망설였다. 테스, 마리케와는 이미 상당한 친밀감을 느꼈지만 여자가 먼저 그 방으로 하겠다고 하기는 조심스러웠다. 그때 테스와 마리케가 먼저 여자에게 물었다.


"우린 좋아! 너 우리랑 같은 방을 써도 괜찮겠어?"

"난 상관없어. 좋지!"

"대신 우리가 더블 침대를 쓰고 너에게 싱글 침대를 줄게!"

"나만 편하게 침대를 따로 써도 괜찮겠어?"

"우리도 상관없어! 얼른 옮기자!"


그래서 여자들은 짐 가방을 먼저 옮겼다. 다음으로 숙소 안에 주차해둔 오토바이 세 대를 옮겨야 했는데, 그때까지도 주인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스위치 위치를 찾지 못한 여자들은 불도 켤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한 대씩 오토바이를 꺼내야 했다. 어두운 데다, 어쨌든 주인이 모르는 상태로 하는 일이었으므로 의도치 않게 도둑질을 하거나 도피하는 상황에 놓인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긴장됐다. 주인을 만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급적 주인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모든 합당한 행위에 스릴을 더했다. 두 대를 꺼냈을 때까지도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긴장감도 덩달아 높아졌다. 그리고 마침내 세 대째를 꺼내려고 할 때 어둠 속에서 주인이 나타났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놀랐다. 수상한 여자들을 보고서도 주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순간의 정적이 여자들을 더욱 긴장하게 했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어쩌겠는가. 이러이러해서 우린 이곳에서 잘 수 없고, 네가 돌아오지 않아서 그냥 숙소를 옮겨버렸다고 통보했다. 주인은 세상에서 가장 쿨한 사람처럼 알겠다고 하더니 남은 한 대의 오토바이를 마저 꺼내도록 도와줬다. 유일한 손님들이 나가겠다고 하는 걸 오히려 반기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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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씻을 수 있게 되어 시계와 팔찌를 풀어낸 후에야 여자는 자신의 손목에 남은 볼라벤 고원의 뜨거운 햇볕을 발견했다. 시내보다 훨씬 시원해서 느끼지 못했지만 겨우 하루 동안 여자의 양손과 손목은 이후 일 년이 지나도 완전히 돌아오지 않을 만큼 까맣게 탄 채로 발견됐다. 눈으로 보고 나니, 그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느껴졌다.


여자는 흐르는 물에 몸을 오래 씻었다. 하루 온종일 온몸에 묻히고 있던 고원의 햇살이 완전히 씻겨나갈 만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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