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해서 아주 적당한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19 - 볼라벤 고원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고원의 날씨는 종잡기 힘들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곧, 다른 기후대로 이동한다는 것과도 같았다. 첫째 날엔 볕이 뜨거워도 바람이 계속 불어줘 땀이 나지 않는 날씨였다면, 둘째 날은 비까지 오락가락하며 변덕을 한껏 과시했다. 여자는 네팔에서 샀던, 밑위가 지나치게 길고 바지통은 필요 이상으로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 바지통 사이로 바람이 쉬지 않고 드나들었다.


전날과 별로 다르지 않은 풍경들, 전날과는 다른 날씨가 여자들에게 안정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안겨줬다. 멀리까지 보이는 길, 높이까지 보이는 봉우리, 여전히 반갑게 손 흔드는 사람들, 겨우 이틀째인데도 낯설기보다는 친근한 느낌을 주는 공간. 몇 년을 살아도 가끔 소름 돋게 낯선 서울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오락가락하는 비 사이로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았다면 여자들은 좀 더 여유롭게 라이딩을 즐겼을 것이다. 오토바이로 달려본 거리가 이백 킬로미터도 되지 않은 사람들도 두려움 없이, 오토바이만 있으면 그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와 해방감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으니까.



거기다 여자는 혼자가 아니어서 좋다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혼자라서 좋은 순간과 혼자라서 아쉬운 순간이 지속적으로 교차했지만, 그 안에서 여자는 한순간도 혼자였으면 좋았을 법한 순간을 경험하지 못했다. 달릴 땐 혼자고, 멈추면 함께였다. 폭포를 찾아 걸을 때는 조금씩 떨어져서 걸었지만, 눈길이 닿는 거리에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좋았다.


점심은 폭포와 커피가 있는 곳에서 먹었다. 폭포, 커피, 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는 nxw coffee가 달리다 보면 맞춤 맞게 배고픈 위치에 있었다. 작은 숲 안으로 물에 젖어 반질거리는 돌들을 다리 삼아 걸어 들어가면 예상보다 훨씬 더 큰 폭포가 나타났다. 도시락을 싸왔다면 펼쳐두고 먹을 만한 나무 식탁과 의자들이 완벽한 나무 그늘 아래 준비돼 있었다.


어찌 보면 크게 다를 것 없는 풍경들이지만, 분명한 것은 크게 다를 것 없는 건물들 사이에 크게 다를 것 없는 표정의 사람들 중 하나로 매일을 살아오는 데에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다른 풍경들이기도 했다.



천천히 걸어서 들어갔다가 천천히 걸어서 돌아 나오는 것으로 여자들은 폭포 구경을 마쳤다.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주문했다. 여자는 라이스누들이라는 메뉴를 주문했는데, 처음 보는 메뉴였다. 면의 모양은 제천영화제에 갔을 때 처음 먹어본 올챙이국수와 비슷했다. 젓가락으로 집으면 올챙이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양새도 비슷했다. 쌀로 빚은 짧고 흰 면발에 매콤한 고추기름과 야채를 섞어 넣은 국수 같은 음식이었는데, 여자는 이후 다시는 그 라이스누들을 맛볼 수 없었기 때문에 여행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음식으로 그곳에서 먹은 라이스누들을 꼽는다.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것은, 볼라벤 고원의 여행자라면 의무와도 같은 것이었다. 여자는 그런 종류의 의무를 사랑했다. 달렸으니 허기를 달래고, 허기를 달랬으니 커피를 마셔줘야 하는 것이다. 느긋하게, 밥을 먹는 데 쏟은 시간만큼 커피를 마시는 데에도 시간을 쏟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여자의 생각이었다.


적당한 시간이 흐르면, “이제 슬슬 출발할까?”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서 절로 나온다. 누군가 그렇게 포문을 열었을 때, 선뜻 “그래!” 하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적당한 시간’이다. 그런 적당한 시간이 흘러 여자들은 다시 오토바이 위에 앉았다. 이제는 고민 없이 머리를 넣을 수 있는 헬멧을 쓰고 버클을 조이고 선글라스를 쓰고 시동을 걸면 다시 한동안은 말없이 달리는 것이다.



둘째 날은 길을 잃지 않아서 도착해야 할 곳에 좀 더 빨리 도착했다. 아직 환한 낮이었다. 처음 가본 대로변 게스트하우스도 나쁘지 않았지만 시간이 있어서 좀 더 마을 안으로 들어가 봤고, 이번에는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주 좋은 숙소를 발견했다. 뒤쪽으로는 동네 사람들이 낚시를 하고 소가 물을 먹는 작은 못이 있었고, 앞쪽으로는 식당이 있었다.



어슬렁거리며 동네를 한 바퀴 돌고 여자들은 숙소 앞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가라오케 식당이었다. 한 세 곡쯤 들은 후부터는 그 노래가 그 노래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노래방 화면에 나오는 뮤직비디오를 통해 대략적으로 노래 가사를 유추해볼 수 있었다. 노래방 기계도 하나, 마이크도 하나였는데, 누군가는 반드시 노래를 불렀으므로 노래들은 도돌이표가 있는 곡처럼 반복을 반복했다. 테스와 마리케는 그 모습을 굉장히 재미있어했다. 뮤직비디오는 열에 아홉이 삼각관계 연애사에 관한 것이었고, 희한하게도 그런 노래들을 부르는 건 죄다 남자였다. 여자들은 저녁을 먹고 맥주도 두어 잔 마시며 그곳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데 숙소로 돌아가기까지는 여자가 노래 부르는 걸 볼 수 없었다.



여자들이 드디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건, 여자가 숙소로 돌아간 이후였다. 여자의 숙소 방 창문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 식당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식당 안 여자들은 밤늦도록 집에 돌아가지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더 희한하게도 여자들은 하나같이 좀 심하다 싶은 음치였다. 단 한 명도 잘 부르는 사람이 없었다. 프라임타임에는 남자들만 노래를 부르고, 손님들이 많이 빠진 후에야 여자들이 노래하는 걸 보고 가부장적 문화가 남아 있어서 그런 거라고 섣부르게 짐작했는데, 노래를 들어보니 그것 또한 편견이었다. 여자들은 노래 실력이 부끄러웠고 그래서 조금이라도 손님이 빠지길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아니, 그런데 그런 게 가능한가? 한 식당에 모여 있는 모든 여자가 음치라는 것.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런 의문 속에서도 여자는 결국 잠에 들긴 했다. 여자들이 노래 부르기를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결코 잠들 수 없을 거라고 괴로워했지만, 여자는 결국 잠이 들었다.


라오스 대중가요를 자장가 삼아 자고 일어난 아침, 숙소를 떠나 처음으로 간 곳은 또다시 폭포였다. 여자는 그곳에서 아침으로 돼지고기 바비큐 구이와 커피를 먹었다. 채식주의자인 마리케와 아침부터 고기를 먹을 정도로 고기를 좋아하지는 않는 테스는 바나나구이와 커피를 먹고 폭포 앞으로 갔다.



굉장히 큰 폭포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까이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여자들은 잠깐 동안에 흠뻑 젖었다. 카메라와 휴대전화에 물이 튀고, 여자들은 그 와중에도 셋이 함께 사진을 찍느라 분투했다. 사진이 예쁘게 나왔을 리 없다. 폭포가 선명하게 나왔을 리도 없다. 하지만 좋았다.



돌아오는 길엔 바닥이 미끄러워서 테스가 미끄러졌다. 폭포에 가면 누군가는 꼭 미끄러진다. 그리고 그때 마리케와 여자는, 그래선 안 됐지만 허리를 꺾어가며 웃어 젖혔는데, 여자는 다시 한 번 그렇게 웃으라고 해도 똑같이 웃을 수 있을 만큼 그때를 선명하게 기억한다. 미끄러진 테스가 괜찮은지 확인하고, 위로의 뜻으로 손으로는 그녀를 잡아 일으키면서도, 허리가 꺾이도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그 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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