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켁, 비엥캄, 나힌을 거쳐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20 - 팍세에서 콩로까지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볼라벤으로 떠난 지 삼일 째 되던 날, 오토바이를 빌리고 짐을 맡긴 호텔로 돌아가니 리셉션에서 토끼 한 마리가 여자들을 맞아줬다. 맡겨뒀던 여권을 돌려받았는데, 오토바이 대여요금으로 삼일 치를 지불하고 갔다가 점심 무렵에 돌아갔더니 차액까지 함께 돌려줬다. 거기다 짐들도 모두 무사히 잘 보관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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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팍세(Pakse)에 더 이상 미련도, 볼일도 없었다. 탓로에서 만난 미국인 여행자와 호주인 여행자들이 알려준 정보를 참고해 콩로 동굴이 있는 마을, 탐콩로로 가기로 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지만 직행 버스가 없었다. 콩로(Konglor)로 가려면 먼저 팍세에서 탁켁(Thakhek)으로 반나절 버스를 탄 다음, 탁켁에서 다시 비엥캄(Vieng Kham)으로, 비엥캄에선 다시 나힌(Nahin)까지 한 번 더 버스를 타고, 나힌에서 다시 콩로로 들어가는 썽태우(Sungthaewoo, 트럭을 개조해 짐칸에 의자를 놓고 지붕을 설치해 운영하는 동남아 지역의 교통수단)를 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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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탁켁으로 가는 가장 빠른 버스를 예약하고, 버스에서 먹을 점심을 사고, ATM에서 현금을 조금씩 더 인출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느리게 정말 한참을 갔다. 중간에 서서 한참 동안 짐을 싣거나 내리기도 하고ㅡ아니 대체 저 많은 짐들이 이 버스 어디에 들어가 있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할 정도의 어마어마한 양이었다ㅡ, 그 틈에 간단한 먹을거리를 파는 장사치들이 버스에 올라타 빠른 속도로 꼬치며, 과일,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밥 같은 걸 판 후 내렸다. 여자의 옆자리에는 현지인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휴게소에 들렀을 때 이것저것 산 것을 먹을 때마다 여자에게 조금씩 나눠줬다. 심지어 손으로 떼어먹어야 하는 밥도.


여자도 원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옆에 누가 앉아 있는데, 혼자서는 뭘 먹지 못하던 사람. 조금이라도 나눠주고 함께 먹어야 마음이 편하던 사람. 하지만 더 이상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차차, 심지어 곁에 아는 사람을 두고도 혼자 먹는 것에 꽤 익숙해져 가던 중이었다. 여자는 그 아주머니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외국인에게 선뜻 그것을 내미는 데는 호의와 더불어 어느 정도의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땅콩도 받아먹고, 밥도 떼어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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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세를 떠나온 첫날 여자들은 탁켁까지밖에 가지 못했다. 탁켁에서 하루를 묵고 다음날 아침 일찍 다시 비엥캄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여자가 기억하기로 탁켁에 도착한 시각은 밤 열 시가 넘어서였다. 터미널 주변에 당연히 숙소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이미 대부분의 숙소들은 문을 닫은 상태였다. 불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던 몇몇 숙소들은 한눈에 봐도 남성 전용 숙소였다.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끌며 터미널에서 조금씩 멀어질수록 여자들은 불안해졌다. 그러다 마침내 문은 열려 있으나 불은 켜져 있지 않은 게스트하우스 하나를 발견했고, 필사적인 마음이 되어 주인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곳의 주인은 중국인이었다. 이상하게도 중국인 주인은 중국어로, 여자들은 영어로 각자 이야기했는데도 무리 없이 대화가 마무리됐다. 다들 조금 지치고 예민해진 상태였는데, 결국 에어컨 딸린 방이라는 호사를 누리는 것으로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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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켁 터미널에서 아침으로 구운 바나나를 사 가지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와이파이가 될 때 다운로드해둔 추리소설을, 스마트폰 화면에 할아버지처럼 큰 글자로 띄워두고 읽으면서 이동시간을 견뎠다. 살인자가 누구인지 밝혀지고, 숨겨진 사연이 모두 드러났을 때쯤 버스기사가 비엥캄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여자들은 또다시 내려 나힌으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렸고, 나힌에선 다음 버스까지 최소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칠판에 따르면 콩로로 들어가는 버스는 하루에 세 번 있는데, 여자들이 나힌에 도착했을 땐 이미 두 대의 버스가 떠난 후였다. 두 시간이면 나힌에 뭐가 있는지는 몰라도 한 번 스윽 둘러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버스가 예정보다 일찍 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있었고, 비까지 억수같이 내리는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주어졌을 때 여자와 여자들은 각자의 짐에서 책을 꺼냈다. 여자와 테스는 종이책을, 마리케는 전자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만약 그 상황을 일상에서 맞이했다면 여자는 짜증을 느꼈을 것이다. 기약 없는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스트레스였고, 낭비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하지만 당시 여자는 여행자 신분이었다. 이동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않기를 바랐지만, 설사 그렇게 되더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비를 피할 만한 천정만 있다면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런 상황은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한 여자가 어느 날 눈물겹도록 그리워하게 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무조건적인 항복 상태. 항복하겠다 말겠다 결정할 여지도 없는, 꼼짝없는 항복 상태. 그래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책이나 읽으며 올 차를 기다리는 일밖에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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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긴 시간이라 생각했던 두 시간이 금세 흘러, 비의 기세도 아주 조금은 꺾였을 즈음 썽태우가 왔다. 터미널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여자들이 썽태우에 타고 드디어 그날의 마지막 목적지인 콩로를 향해갔다. 콩로는 산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그 안에 강과 동굴을 품은 작은 마을이었다. 오랫동안 많이 내린 비는 마치 연기 같은 구름을 산허리까지 내려보냈다. 움푹 파인 길 곳곳 빗물 웅덩이를 피하느라 썽태우 기사가 곡예운전을 하는 동안에도 눈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이 마을 구석구석 내려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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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로는, 정확한 형체도 없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도 없는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이 사람 사는 동네에 어떤 형체로 구현된다면 바로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가 걸려 콩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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