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보다 아이슬란드 #11
여행지에서 나를 가장 흥분하게 하는 건 우연과 우연이 안내한 풍경 혹은 경험이다.
가려고 미리 계획했던 곳은 어느 정도 미리 알고 가는 곳이다. 그곳의 어떤 점이 나를 매혹시키고, 나를 기대하게 한 후 대개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지만 때로는 아직 가보기 전이 더 설레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아이슬란드의 곳곳, 어디 하나 놀랍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런 점에서 Vik는 우리 모두에게 너무 특별한 장소로 남아 있다.
우리가 처음으로 간 곳은 이 검은 모래의 해변이었다.
부드러운 검은 모래의 바닷가에서 바다를 보고,
모래 위를 걷고,
누군가 돌로 적어놓은 글자를 구경하고,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적어놓은 글자 앞에 나란히 누워도 보고,
모래만큼 반질반질한 돌도 줍고,
우리는 언제든 우리가 원할 때, 원하는 만큼 갈 수 있는 여행자니까 그저 앉아있기도 하고,
우리만큼이나 한가로운 다른 여행자들을 몰래 훔쳐보다가,
들키기도 하고,
검은 모래밭에 앉아 뒤쪽 언덕을 한 없이 올려다 보고,
그러면서도 저기 저 언덕 위에 우리가 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한참을 거기서 빈둥거렸다.
그러다 장이나 봐서 숙소로 돌아갈까 하고 나오는 길엔 오래돼 보이는 나무와,
정확한 용도는 알지 못한 채 그저 추측할 뿐인 나무더미들을 발견하고는, 저기에 누군가 시체를 묻고 불태워버린 건 아닐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떤 나라를 여행하기 전에 여행 정보가 있는 책보다는 그 나라의 작가가 쓴 소설을 읽어보는 편인데, 아이슬란드에 오기 전에 읽은 책들이 죄다 추리소설이었던 탓도 있지만, 차를 타고 다니면서 "아, 여긴 누구 한 명 사라져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두려움도 살짝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들을 하며 해변에서 빠져나오는데, 아까 해변에서 봤던 뒤편 언덕으로 차 한 대가 살금살금 오르는 것이 보였다. 멀고 높아서 그곳에 길이 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마침 우리가 해변에서 빠져나와 그 언덕길을 바라봤던 그 순간에, 바로 그 순간에 그 차가 올라가면서,
여기에 길이 있다
고, 그러니
너희도 올라올 수 있다
고,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냥 돌아가기 아쉬웠던 우리는 그 차가 올라갔던 길 쪽으로 무작정 가봤는데, 거기에 이런 표지판이 있었다. 사륜구동만 올라갈 수 있는 그런 길이었던 것이다.
찻길의 경사는 최소 40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우리에겐 베스트 드라이버와 사륜구동이 있었으므로, 더군다나 일단 올라가기 시작하면 멈추는 것이 더 어려웠으므로, 결국 편평하게 펼쳐진 길이 나와 안전하게 차를 세울 때까지 올라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은 없었다.
올라가는 내내, 엘은 손잡이를 놓지 않았고, 올라가는 내내, 나는 소리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올라갈수록 아래쪽으로 이런 풍경들이 조금씩 더 넓게 펼쳐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올라간 곳의 풍경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저 멀리로는 빙하로 뒤덮인 산도 보이고,
비크 언덕에서 내려오기까지 얼마 동안의 시간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물리적인 시간은 중요하지도 않다. 저기서 하루 종일 있었어도 내려오는 그 길은 눈물의 이별이었을 것이고, 저기서 단 5분을 보냈어도 아마 평생 그곳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바라본 바다, 우리의 배 밑에 깔렸던 부드러운 잔디들, 다른 편 언덕 너머로 보이는 빙하로 이루어진 산, 주위를 날아다니던 새들, 그 공기는 코가 빨개질 만큼의 추위도 잊게 하고, 내일 가야 할 곳도 잊게 하고,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도 잊게 하고, 잊으려고 해도 도저히 잊히지 않던 지긋지긋한 잡념들도 잊게 하고, 오로지 그 순간에 그곳에 우리만 있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