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가입니까

누가 작가입니까

by Mihyang Eun

혼자 원해서 쓴 단편소설이었고, 혼자 원해서 만든 책이었지만 단편소설 하나를 겨우 써서 얇디얇은 책을 만든 이후 간혹 가다 '작가님'이라고 호명될 때가 있다. 키친테이블라이팅 계간지 영향력을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는 '편집장님(영향력의 발행인은 2명이고 편집인은 현재 3명이지만 편집장은 따로 없다)'이라고 호명되기도 한다.


문자로 그리 불릴 때는 혼자 얼굴을 붉히고 말지만 얼굴을 마주하고 그리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릴 때는 차마 눈을 마주 보지 못한다. 누군가 그렇게 호명할 때 치미는 감정은 '부끄러움'이다.


오늘 영향력을 함께 만드는 동료도 같은 경험과 감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지난 주말 대구 독립출판물 서점 더폴락에서 열린 대구지역 제작자&책방운영자 모임에서 누군가가 '편집장님'이라고 호명했는데, 영 어색했던 것 같다. 정확히 '부끄러웠다'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비슷한 감정이 아닐까 넘겨짚고 있다.


"글을 써요."라고 하는 건 덜 부끄러운데 "작가예요." 하는 건 부끄럽다.

"소설을 써요."라고 하는 건 덜 민망한데 "소설가예요." 하는 건 민망하다.

"책을 만들어요."라고 하는 건 괜찮지만 "편집장이에요." 하는 건 이상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스스로를 '작가', '시인', '소설가' 혹은 나아가 '예술가'라고 소개하는 타인들의 소셜미디어 계정들을 보면서 괜히 혼자 민망해한 적도 있다. 안다, 못난 생각이고 전형적인 속물의 반응이라는 걸.


농담을 곁들여 이런 분석을 해보기도 했다. 내 이름은 '은미향'이 맞지만, '미향이는 부끄러워요'라고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면 부끄러운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 아닐까 하고. 원래 호명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해주는 것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타인의 호명에도 여전히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른다는 것이다.



작가라는 호명이 부끄럽지 않았던 때는


내 첫 번째 직업은 '라디오 구성작가'였다. 당시에는 '은 작가' 혹은 '작가님'이라고 불리는 게 아무렇지 않았다. 물론,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작가'라고 호명됐을 때는 달랐지만 점차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오랜 꿈이었으므로 그렇게 불리는 게 좋았지, 부끄럽지는 않았다.


작가라고 호명될 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일고 일지 않고의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것은 누군가의 공인과 익숙함에서 비롯됐던 것 같다. 원고를 써서 월급을 받았고 월급명세서에도 작가라고 표기됐으며 누구나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내가 정말 작가가 맞나. 작가라고 불려도 되나. 고뇌하지 않았다.


가끔 브런치에서 '브런치 작가님들'이라고 복수로 지칭될 때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것 역시 브런치라는 플랫폼에서 글 쓰는 사람들은 브런치 작가로 부르기로 했다는 약속이 바탕에 깔려 있었고, 무엇보다 직접적으로 나를 브런치 작가님이라고 부른 것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누구를 작가라고 부르지


그럼 대체 작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고, 작가라고 불려도 어색하지 않을 사람들은 누군가.


적어도 '글을 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부르는 것 같지는 않다. 기자도 매일매일 글을 쓰지만 작가라고 하지 않고 블로거들도 많은 글을 쓰지만 블로거라고 하지 작가라고는 하지 않는다. 기자에게 작가라고 하면 이는 오히려 비아냥일 수 있는데, 기자는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기사를 써서 전달하는 사람이고, 작가는 사실 그대로를 써서 전달하는 것만으로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에서 '작가'의 뜻을 새삼스럽게 찾아봤다.


작가 (作家) [작까] - [명사]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따위의 예술품을 창작하는 사람.


찾아보고서 왜 내가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부끄러웠는지 새삼스럽게 알게 됐다. 글을 쓰고 있는 것도 맞고, 주로 소설을 써서 완성하려고 하고 있으니까 문학 작품을 창작하고 있는 것도 맞는데,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 '예술품'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부끄러웠던 거였다. 보기에 따라, 말하기에 따라, 어떤 것도 예술품이 될 수 있지만 적어도 내 마음속에 품어온 예술을 규정짓는 잣대, 특히나 훌륭한 예술을 규정짓는 잣대로는 감히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이 창작품이긴 해도 예술품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그건 등단이라는 제도를 통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작가들도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공인받았고, 그 후로 꾸준히 그렇게 불리고 있기 때문에 나 같이 등단하지 않은 채 글을 써서 책에 싣고, 정식 출판사를 차리지 않은 채 소규모 독립자본으로 책을 만드는 사람보다는 훨씬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그리고 이건 슬픈 예감 같은 건데, 나는 아마도 평생 작가라고 불리는 것에 완전히 자연스럽게 익숙해지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프니까, 나는 소설을 쓰고 있으니까, 소설가라는 호칭 앞에서는 좀 더 당당해져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소설가'의 사전적 정의도 새삼스럽게 찾아봤다.



작가가 못 되면 소설가라도


소설가 (小說家) [소ː설가] - [명사] 소설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슬프게도 소설가 또한 아직 아니다. 소설을 열심히 쓴다고 소설가가 아니고, 소설 쓰는 일을 '전문적으로' 해야 소설가인데, 어떤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지 여부는 보통 그것으로 돈을 버는지 여부로 가린다. 나는 소설을 써서 책을 만들고, 그 책을 팔기도 했지만, 그걸로 돈을 벌지도 못했고 전문가라고 할 만큼 많이 써 본 것도 아니니까 이래저래 전문적으로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절망감만 가득 드러내 보이려고 이 글을 시작한 건 아니니까, 예전에 연희문학창작촌에서 소설가 손홍규 선생님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 이미 소설가'라고 용기를 북돋워주신 바 있다는 사실을 애써 기억 해내 본다. 선생님은 소설을 써보겠다고 그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이미 소설가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나는 아직 지망생입네, 예비 소설가입네 하고 도망갈 생각 말라고. 그 격려에 힘입어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한 편씩 소설을 완성해내긴 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어디 가서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입니다'하고 인사는 못할 것 같다.


위안을 삼자면 지금 만들고 있는 문학잡지 영향력에 글을 싣는 분들은 작가가 확실히 맞다. 영향력은 글을 싣고 나면 원고료를 지급한다. 비록 원고료라고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금액이지만 그건 책을 만드는 우리의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이지, 작가들의 글의 값어치가 그만큼이라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와 좋아하는 작가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한편으로는 또 다른 부끄러움도 인다. 등단만이 작가가 되는 공인된 방법이 아니고, 등단하지 않고서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많다는 생각에서 영향력을 시작해놓고선 여전히 기존의 잣대에 의해서 작가를 논하고 있으니까. 아마도 이는 오랜 학습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가라고 불려도 문제 될 것이 없는데, 화가라고 모두 좋은 화가가 아니듯, 작가 중에서도 좋은 작가와 좋아하는 작가가 저절로 나뉠 텐데, 굳이 '작가'라는 명칭을 붙여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부터 우리는 벌써 권위를 필요로 하고, 권위가 없으면 그렇게 부르기를 망설이게 됐으니까.


그런데 여전히 그 오래 이어져온 학습과 권위가 무섭긴 무섭다. 이렇게 쓰면서도 여전히 나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것은 못하겠다. 다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매일매일 꾸준히 계속 쓰는 것, 쓰면서 그런 호명 앞에 조금이라도 얼굴이 덜 붉어지도록 고치고 또 고쳐 쓰는 것, 그리고 그렇게 '권위 있는 자의 인정' 여부와는 관계없이 꾸준히 쓰는 키친테이블라이터들, 영향력에 투고해주는 작가들을 위해 최대한 오랫동안 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소 비장하지만, 비장한 마음이 아니라면 할 자격이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여기까지 쓰고 마침 읽고 있던 책에서 관련된 두 가지 일침을 발견했다.


물론 아무도 작가가 무엇인지는 모르고, 아무도 작가를 한 명 보았다고 단언할 수가 없으며, 온갖 상 공모들, 아카데미들, 사례금 수령과 명예직 수여가 작가 한 명을 생포했다는 보장도 아니다.

나는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정말로 수십 명의 작가들만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추정한다. 사람들이 그들로 인해 먹고살아간다는 사실로 인해 그들이 먹고살아갈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 로베르트 무질 <생전유고> 중 '문화문제' 일부


눈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아마 부끄러워서 몸이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언어의 망각을 발단으로 줄거리가 전개되는 어떤 동화의 기본 골격을 이야기했다. 이 주제야말로 다른 어떤 전설보다 음악에 안성맞춤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음악가들은 어린애나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결함의 주민들이다. 어린애는 유년기*enfance라는 단어 자체가 의미하는 바인 이 결함 속에서 최소 7년을 거주한다. 음악가는 노래를 통해 이 결함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작가는 이 끔찍한 공포의 영구주민이다. 간단히 정의하면 작가란 언어가 마비stupor된 자이다.

*enfance는 라틴어 infans(말 못하는)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 파스칼 키냐르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중 '아이슬란드의 혹한' 일부


두 가지는 다른 방향의 이야기 같아 보이지만, 결국은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누구나 작가가 된다기보다는 그제야 진짜 작가가 되는 길목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영향력의 키친테이블라이터들은, 우리는 혀끝에서 맴도는 그 이름을 언젠가 반드시 기억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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