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재심>
시창작수업에서 선생님은 우리가 써 낸 시를 읽고 나면 이렇게 질문하시곤 했다.
"그래, 이 시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가 뭐냐."
학생들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시어가 아닌 생활언어로 이러저러한 얘기를 하고 싶었음을 설명하고, 선생님은 대체로 이렇게 반응하셨다.
"지금 너 얘기하는 게 더 시 같다."
영화 재심을 보고 나와서 십 년도 넘은 시창작수업이 떠올랐다.
너무 시 같은 시를 쓰려다보니 오히려 시에서 멀어지곤 했던 그때의 우리가 쓴 시들처럼, 이미 충분히 영화 같은 이야기를 더 영화답게 만들려다보니 실화가 가진 힘이 오히려 빠져버렸다.
첫 번째 아쉬움
우선 배우 정우가 연기한 이준영 변호사라는 인물.
어떤 서사에서든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는 인물이 가장 중요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 '재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바로 이준영 변호사다. 당당하게 그래 나 돈 밝히는 변호사요, 변호사가 언제 의뢰인의 유무죄를 따졌소, 하던 속물 같은 변호사가 그 누구보다 진심으로 의뢰인의 편에 서는 인물이 되어 제목 그대로의 '재심'을 이끌어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이 너무 헐거웠다. 영화 초반부는 이준영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데에 상당히 할애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그를 좀 더 속물적으로 보이게 하는 농담으로 채워졌다.
부부싸움을 할 때도, 사활을 걸었던 재판에서 졌을 때도, 정말 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거나 꼭 취직해야 하는 로펌의 대표와 대화할 때도 그는 끊임없이 농담을 하는데, 엄청나게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을 너무 자주 반복하다보니 어느 순간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는 인물 같지 않았다.
그보다는 적당히 울리고 웃기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 그 자체로 살아움직인다기보다는 창작자의 의도를 담아내기 위한 편평한 종이인형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았다.
어중띤 농담을 변주하가며 반복하거나 가정사며 대학시절의 에피소드들을 겉핥기식으로 늘어놓기보다는, 이준영이 왜 그렇게 이 사건에 마음을 쓰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데에 더 공을 들였더라면 어땠을까. 그가 왜 갑자기 의뢰인 어머니의 일을 도와주고 있는지, 어쩌다 온 마을 사람들의 법률자문을 해주게 됐고, 어떠한 심경의 변화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의뢰인에게 사과하게 됐는지, 왜 그토록 원하던 조건 좋은 일자리를 마다하는 인물이 됐는지를 설득력 있고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데에 더 치중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두 번째 아쉬움
실화를 극화하려고 만들어넣은 듯한 몇몇 장면들도 아쉬웠다.
술을 먹다가 지나가는 말로 한 얘기에서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찾는다든지(영화에서 배우 이동휘가 연기한 동료변호사 모창환이 이준영과 술을 마시던 도중 안주에 술을 쏟고 "이걸 무를 수도 없고" 하니까 "잠깐 뭐라고 했어?" 묻고는 "왜 무를 수가 없어?"하며 재심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오래전에 받은 돈봉투를 한참 시간이 지난 후 초심을 떠올려야 하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에 안주머니에서 꺼낸다든지(그걸 내내 안주머니에 넣고 다녔단 말인가), 이준영이 정의나 진실 따위 무시하고 돈만 밝히는 동료에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한방 먹인 후 (이 장면도 좀 오글거리긴 했지만) 회사를 떠나려고 할 때 기다렸다는 듯 대표가 짠 하고 나타나 그를 붙잡는다든지(대표는 원래 제일 안 바쁜 사람이기는 하지만) 하는 드라마틱한 요소들은 모두가 너무 짜맞춘듯이 시의적절해서 리얼리티를 떨어뜨렸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목표하는 이야기의 흐름에 맞게 짜맞춰지고, 인물이 그렇게 짜맞춰진 동선 안에서 움직이면, 이야기는 동물적이기보다는 식물적이게 된다. 하지만 나는 화분에 심어둔 꽃이 아니라 깊은 산 속을 마음껏 다니는 동물이 보고 싶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데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 영화에서만 일어날 법한 일이 일어났다,고 느껴지면 그 순간 영화에 대한 몰입은 깨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장점
재심이라는 제목을 버젓이 달고도 재심 그 자체보다는 재심이 이뤄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는 점은 좋았다. 재심이라는 것이, 재심재판 자체보다도 재심의 근거를 획득해 재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더욱 본질에 가깝기 때문에.
주요 배우들의 연기도 괜찮았다.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쥐고 흔들었던 일을 영화로 만들어서 이 사회가, 혹은 우리 자신이 비슷하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도 의미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우연히 클릭해본 <Making Murderer>라는 미드는 어쩜 그렇게 영화 <재심>과 닮았는지, 세부사항들을 빼고 큰 줄거리만 보면 두 작품이 서로 같은 작품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둘 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까지 같다.
사법체계의 허점과 인간의 욕심 때문에 어느 장소, 어느 시대에서든 벌어질 수 있고 반복될 수 있는 그만큼 보편적인 이야기인데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기본 저력이 있는 이야기에서 출발했기에 아쉬운 점들이 더욱 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