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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yang Eun May 07. 2023

행복할 것 같았던 연휴는

지나갔기 때문에 더는 행복할 것 같을 수 없어

9일간의 행복할 것 같았던 연휴는 모두 지나가버렸다. 다가올 때는 행복할 것 같은 연휴였지만 이제 대부분 지나가버렸기 때문에 더는 그렇게 부를 수 없다.


지난 9일간 놀랍게도 책을 한 장도 읽지 않았고, 뭐 했지, 나? 싶을 만큼 한 게 없이 지냈다고 말하기엔 겨울옷과 침구들을 모두 세탁해서 보이지 않는 곳에 집어넣고 베란다며 욕실을 청소했고 고양이들의 끼니와 물을 챙겨드리고 놀아드리고 친구들과 한남동과 파주에서 놀았고 친구집에서 하룻밤을 잤으며 차로 17분 거리 아파트로 이사 온 친구부부네 집들이도 다녀왔고 병원 가서 코로나 검사도 했다. 무엇보다 잠을 많이 잤다.


연휴의 마지막 날, 다소 침통한 심정이 되어 남은 오후를 뭘로 보낼까 고민했다. 청소를 할까, 책을 읽을까, 고민하다가 청소도 독서도 아닌 영양제 정리를 했다. 내일부터는 영양제를 정말 잘 챙겨 먹어야지 하면서 영양제 정리를 하는 김에 어지럽게 섞여있던 약도 정리하고 핸드크림, 미스트 등등도 질서 정연하게 자기들끼리 모여있을 수 있게 두었다.


청소는, 아는 분은 알겠지만 고양이들과 사는 집은 방금 전의 청소도 다소 의미가 없어서 또 청소를 해야 하나, 하면 뭘 하나 싶지만 하지 않으면 또 금세 털과 모래로 가득해지고 이것은 나와 고양이들의 건강에 좋지 않으므로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으로서 일단 로봇청소기에게 초벌 청소를 시키고 그러는 동안 나는 드디어 책을 읽어야지, 하고 해먹에 누웠다. 해먹이 채 열리지 않은 상태로 앉는 바람에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그니와 으니가 놀라서 뛰어나왔다. 고양이들과 사는 보람. 미리는 이 정도로 뛰어오지 않는다.


오케이구글에게 “유튜브에서 라디오헤드 라이브 틀어줘”라고 시켜두었기 때문에 오며 가며 시선을 빼앗겼고, 때때로 가슴이 뛰었지만 일단 오늘 오후는, 해가 지기 전까지는 책을 읽을 것이다. 읽을 책은 정지돈의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이고, 아마 이 책의 제목은 죽을 때까지 외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런 책 제목이 두 글자짜리 책 제목보다 더 잘 외워질지도 모른다. 외우려고 하지 않았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읽으려다가 연결되어 버리는 식으로?


연휴 중반쯤 도저히 책 읽을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알라딘에서 새로 주문해 받은 것이다. 요즘은 정지돈의 글만 겨우 읽히고 도무지 다른 책들이 읽어지지 않는다. 정지돈의 글이 든 다른 책 몇 권도 같이 샀는데, 벌써 책 제목은 생각 안 남.


책 제목을 외워야 하는 이유는 뭔가? 다른 사람과 얘기하기 위해? 그런데 요즘 나는 누굴 만나서 책 이야기를 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일 외적으로 사람을 만나는 빈도와 자주 만나는 사람들의 관심사 측면 모두에서 기인한다. 물론 그전에 책을 읽지 않는 내가 있다.


책 제목을 외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 똑같은 책을 까먹고 또 사는 일을 막기 위해서? 전에 그런 적이 몇 번 있는데 적어도 알라딘에서 사는 경우라면 전에 산 적이 있는데 또 살 거냐고 물어봐주니까 괜찮다. 오프라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것은 온라인에서 주문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책을 손으로 잡고 느끼고 펼쳐보는 행위가 수반되므로 다른 구매 행위라고 봐도 좋다. 그러므로 이 또한 괜찮다.



해먹에 앉아, 일본 출장 때 짐보쵸 글리피커피에서 사 온 원두로 내린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벌써 좋았다. 저 멀리 아일랜드 식탁 위에선 톰요크가 열정적으로 공연을 하고 있고, (이건 실제로 서재페에서 느끼는 거리감과도 같고), 뭔가를 마시며(술이 아니라는 게 다르지만) 책을 읽으니 조금은 서재페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몇 장 읽지도 않고, 계속 이 좋은 상태를 이어가는 대신 일단 기록해 두는 쪽을 선택했다. sns 중독이다.


올해 서재페 3일 차에 데미안 라이스가 오고, 몇 년 전 서재페에서 핑크색 비옷을 입고 가운데 바에 기대 데미안 라이스 공연을 봤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서 몇몇 친구들에게 같이 가자고 해봤지만 아무에게도 확답을 받을 수가 없었다. 어디든 혼자 갈 수 있지만 서재페만큼은 어쩐지 혼자 가고 싶지 않은데, 더블유컨셉에서 서재페 티켓 이벤트에 응모해 뒀고 어쩐지 당첨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만약 꽝이라면 그것은 지금의 설레발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공짜티켓으로는 누구든 꼬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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