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청춘보다 아이슬란드 #29
아이슬란드의 해는 오래 진다.
달빅 근처 이름 모를 동네까지 차로 갔다가 돌아올 때 이미 바닷물이 불긋불긋했는데, 다시 달빅으로, 그리고 다시 아쿠레이리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해는 오랫동안 지고 있었다.
강 건너가 훤히 보이는 숙소에서는 그래서 피로 다 벗어던져놓고, 편한 자세로 아쿠레이리의 일몰을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본 후, 엘과 나는 둘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맥주가 떨어질까 봐 주류 상점이 보일 때마다 맥주를 사서 거의 매일 밤을 시원한 맥주로 마무리했지만 여행 7일째쯤 되자 바에서 마시는 생맥주가 그리웠고 전날 밤늦게 도착해 못다 한 시내 구경도 하고 싶었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기에 앞서 우린 아이문드손(Eymundsson)이라는 유명한 서점 겸 레코드 가게에 들렀다. 아이슬란드 답게 그곳에선 시규어 로스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시규어 로스 음반은 이미 모두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이곳에서 햘탈린(Hjaltalin)의 Lucifer / He Felt Like A Woman이라는 음반을 샀다.
아이슬란드에 올 때 핀에어와 아이슬란드 에어를 탔는데, 비행기에선 아이슬란드 밴드의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햘탈린의 새 앨범을 듣는 순간 완전히 반했다.
Hjaltalín - Lucifer/He Felt Like A Woman (Live on KEXP)
당시 햘탈린의 앨범은 판매 10위를 기록하고 있었는데, 난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한동안은 햘탈린의 이 음반만 들었다. 여행 직후 내 마음의 1위.. 였다.
서가에는 아이슬란드 여행 전 내가 읽고 온 아이슬란드의 추리소설 작가 아날두르 인드리다손(Arnaldur Indridason)의 책이 꽂혀있었다.
아날두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은 우리나라에 <무덤의 침묵>, <저주받은 피>, <목소리> 3권이 번역돼 있는데, <목소리>는 아이슬란드에 가서 마저 읽었고, 나머지 2권은 미리 읽었다. (안타깝게도 현재 이 3권은 모두 절판된 것으로 나오는데, 아이러니하게 달빅 북극해 고래 투어 때 소개한 <친구는 바다 냄새>도 절판 상태다.)
그래서 혹시라도 내용을 궁금하시다면, 당시 알라딘에 남긴 감상문을 읽어봐 주셔도 고맙다.
<무덤의 침묵> 감상문 조바심을 누르고 인내하며 꼭꼭 씹어 읽게 되는 중후한 스릴러
<저주받은 피> 감상문 추운 나라에서 온 뜨거운 범죄 소설
어쨌든 그런 이유로 아이문손 서가에서 이 작가의 작품을 발견하고 정말 반가웠다. 우리나라에까지 번역된 작가인 만큼 아이슬란드에서도 꽤 알려진 작가라는 걸 서가만 봐도 알 수 있었는데, 그의 추리소설은 재미를 넘은 감동이 있었다. 어쨌든 죽은 사람이 등장하고 죽인 사람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이토록 진심 어린 인간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는 추리소설 작가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기특하게도 벤자민은 언니에게 잘해 줬어요. 연애편지 같은 것도 썼고. 그 당시에 레이캬비크 사람들은 약혼을 하면 긴 산책을 나가곤 했어요. 평범한 구혼 과정이었죠."
<무덤의 침묵> 중
"아이슬란드에서 사람들이 실종되는 전형적인 시나리오야. 우리는 이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런 사건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지. 날씨가 얼마나 갑작스럽게 나빠지는지, 또 그 사람의 경우와 비슷한 일이 끊임없이 발생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누구도 그런 일을 의심하지 않아. 그런 곳이 바로 아이슬란드니까."
<무덤의 침묵> 중
에들렌두르는 그라파르홀트로 가는 길에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실종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욘 아우스트만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욘 아우스트만은 1780년에 블론두길에서 얼어 죽었다. 그의 말은 목이 잘린 채 발견되었지만 욘의 유해는 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손은 파란색 니트 벙어리장갑 안에 들어 있었다.
<무덤의 침묵> 중
이런 문장들을 읽으면서 알 수 없는 흥분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물론, 내가 이곳에서 이 소설과 비슷한 일을 겪을 가능성이 없다는 무모하지만 강력한 믿음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쨌든 여행책에서 "아이슬란드는 어쩌고~ 저쩌고~"하는 것보다 소설 속에서 자연스럽게 엿볼 수 있는 아이슬란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카페에선 아이슬란드 국민 시인의 시집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는 작은 시집 한 권도 샀는데, (책이 서울 방에 있어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점원이 책을 계산하면서 "아이슬란드어를 할 줄 아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지만 유명한 시인의 시집이라기에 기념으로 한 권 사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독일어와 영어, 아이슬란드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하던 예쁜 그녀는, 그 시인의 시는 고어를 많이 사용하는 걸로도 유명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도 그의 시나 시어를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해주면서 원한다면 시 한 편을 읽어주겠다고 했다.
감동한 나는, 양해를 구하고 시 읽어주는 그녀를 촬영했다. 서점에서 CD 1개, 시집 1권 샀을 뿐인데 이런 친절이라니. 무엇보다 그녀는, 참, 예뻤다.
아이문손에서 나온 우리는 본 목적(?)인 맥주를 마시러 갔다.
역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아쿠레이리 교회 옆 언덕 왼편에 있던 작은 바에서는, 맥주를 종류마다 맛 본 다음 마시고 싶은 맥주를 골라 마실 수 있었다. 내가 에일을 마셨던가, 라거를 마셨던가, 역시 기억나지 않지만 그날의 피로가 싹 가시는 것 같았다는 것만은 확실히 기억한다.
샘플 맥주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를 정도로 맥주 인심이 좋았던 그곳은 무엇보다 화장실이 참 특이했는데, 변기 옆에 놓인 의자와 수납함이라니. 이것이 북유럽의 감성인가, 맥주에 취해 그렇게 생각했었다.
맥주를 마신 후엔 문 닫힌 아쿠레이라르키르캬(Akureyrarkirkja)를 구경했다. 레이캬비크에 있던 할그림스키르캬와 비슷하게 직선 위주로 곧고 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이었는데, kirkja는 아이슬란드어로 '교회'를 뜻하나 보다.
문 닫힌 교회를 둘러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언덕 위에 있던 교회에선 강 건너편이 바라다보였기 때문에, 우리 숙소가 있을 어딘가는 조금 더 오래 바라봤다. 저 불빛들 중 하나가 우리의 일행과 우리의 짐들을 비추고 있을 것이다.
아쿠레이리에서 보내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밤, 우리는 아쉬워서 넓지 않은 시내 구석구석을 걸었다.
구글 번역기에 물어보니 "너와 너의"까지만 알려주고 hafurtask가 무슨 뜻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으므로, 나 역시 지금까지도 알지 못하는 벽이 되었다.
문 닫힌 중고서점 앞에서 아쉬운 맘으로 서성거렸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식당이나 가게들도 구경했다.
아쿠레이리 부동산 시세도 알아보았다.
아쿠레이리의 한 사진관에서는 고객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관하고 있다가 그 사진과 함께 지금의 모습을 찍어주나 보다. 멋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다시 음악 소리가 들리는 한 카페에 들어갔는데, 아래층에서는 밴드가 라이브를 하고 있었고, 위층에선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밤나들이를 끝내고,
다시 숙소의 문 앞,
다시 아쿠레이리 강 저 건너편의 불빛들을 오래오래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여행이 거의 막바지를 향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