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실패를 인정하기까지

육주동안(逳住東顔) 동남아 여행 번외 편 #01 - 프롤로그

by Mihyang Eun
스물다섯에 라디오 방송작가로 일을 시작해서
서른다섯에 다니던 스타트업을 그만둔 여자는
퇴사 18일째 되던 날 동남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그 여자가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를 두루 다니고(逳)
잠시나마 살면서(住)
동(東)남아의
낯(顔)을 마주하러 떠난
육주동안(逳住東顔)의 여행 이야기,
다음스토리펀딩 연재의 '번외 편'이다.


타자화 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 승효상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중



제대로 실패했다.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회사를 왜 관두냐고 누가 물으면 건강 때문이라고도 했고, 온종일 일만 하고 싶지 않아서라고도 했고, 소설을 쓰고 싶어서라고 하기도 했다. 모두 사실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에서 천재 수학자 이시가미는 남편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야스코에게 말한다.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가면 오직 ‘사실’만을 진술하라고. 야스코를 사랑한 이시가미가 그녀의 진술을 모두 ‘사실’로 만들어준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 야스코를 위해 이시가미가 한 것처럼, 여자도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 이런 건 충분히 가능하다 - 자기 자신을 위해 사실로 이루어진 진술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에 사실이 항상 진실은 아니다. 진실은 여자가 실패했다는 것. 그래서 인정받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건가 하는 심증은 있지만 아직 물증은 없을 때 본능적으로 거기서 도망친 것이었다.


하루를 열흘처럼 일했던 회사를 정리하는 데 주어진 시간은 한 달 정도였다.


회사를 정리하는 한 달 동안 여자는
우기의 동남아를 떠올렸다.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려 의자 깔고 치우기를 반복해야 했던 시하눅빌의 바닷가 식당들


우기의 동남아를 떠올리는 일. 알고 보면 그것도 오로지 여자 자신의 독창성에서 비롯된 취향은 아니었다. 실은 회사를 그만두기로 하고 나서 <라오스>라는 제목의 독립영화 한 편을 우연히 보게 됐다. 임정환 감독이 연출한 영화 <라오스>에서 현철이라는 인물은 함께 라오스에 간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다. 덕분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신세가 되고, 그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엔 딱히 할 일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


닦이지 않은 흙길 위에 하루 종일 세찬 비가 퍼부어 발이 푹푹 들어갈 만큼 질펀한 땅, 그 위에 지어진 작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손을 돕는 것으로 숙박비를 대신하며 하루하루를 지내는 현철의 신세. 오매불망 친구를 기다리며 어디 가지도 못하고, 어디 가려야 갈 돈도 없고, 어디 갈만한 날씨도 못 돼서 그저 그곳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상황. 여자는 그것을 원했다. 물론 그 모든 이야기에서 배신당하는 부분만 빼고.


섭씨 삼십 도를 훨씬 웃도는 후텁지근한 날씨, 온종일 비가 내려 할 일이라고는 그저 쏟아지는 비를 구경하는 것밖에 없는 그런 동네에서 원 없이 빈둥대며 글을 쓰고 싶었다. 부담 없는 여행 경비 또한 중요한 이유였다. 지난 크리스마스에 중이염 수술을 받은 후에도 귀에서 매일매일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물이 완전히 마를 때까지 백수로 지낼 수 있는 기간을 가능한 한 이 벌어두려면 최소한의 돈을 써야 했다.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줄이면 경비 또한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을 거고, 최대한 오랫동안 여행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을 했다.


우기의 동남아. 그중에서도 여자는 라오스에 가고 싶었다. 우기의 라오스라면 꽃보다 시리즈의 여파를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곳에서 영화 속 현철보다 더 무기력한 나날을 보내볼 작정이었다.


도착해서부터 떠나는 순간까지 비가 내린 라오스 방비엥


하지만 여자는 태국 방콕에서 여행을 시작한다. 역시 돈 때문이었다. 때마침 에어아시아에서 항공권 초특가 프로모션 중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마침'이라는 것이 '상시'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어도 동남아권에 진입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항공권이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즉흥적으로 바꾼 여행 계획 덕분에 후에 여자는 방콕에서 만난 한 남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뜻하지 않은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했고, 계획보다 훨씬 일찍 캄보디아에 도착해 생각보다 훨씬 오래 캄폿(Kampot)이라는 곳에 머물게 됐고, 바로 그곳에서 고치기를 포기하고 있던 소설을 고쳐쓸 수 있게 됐다.


여행하는 동안 인스타그램이며 페이스북에 적절히 여행사진과 감상을 올려서 "지금 가장 부러운 사람"이라는 고백도 적지 않게 받았다. 혼자 하는 여행이 재미없거나 외로워서 그 멀리까지 가서도 소셜미디어를 놓지 못한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만 타이밍과 업로드 분량 조절을 한 덕분이었다.


더구나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는 캄폿에서 마무리한 단편소설을 작은 책으로 만들었다. 자기가 쓴 글과 찍은 사진으로 자기 돈 들여서, 편집 디자인을 배워가며 인쇄와 판매까지 자기 혼자 다 한 것이긴 했지만,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글 쓰는 사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꿈을 잠시나마 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은 비록 다시 직장인이 됐지만, 전업 작가라는 꿈의 가능성을 시험해보려고 여행 이야기를 써서 한 번 더 출판해보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다. 여행 이야기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인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척했고, 소설계의 아이돌이라 불리는 작가들조차 완전히 전업 작가로 살지는 못하고 있는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냉정한 객관화가 안 되었던 덕분에 어쨌든 결국 이 이야기가 책으로 나오기는 하게 됐으니 이걸 불행이라 해야 할지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래도 한 가지 자랑할 만한(?) 것은 여자가 육 주 동안의 여행 동안 쓴 경비 정도가 아닐까.


육주 동안 백팔십만 원


에어아시아에서는 태국행 편도 티켓만 끊고 돌아오는 건 다른 항공사에서 예매를 해둔 데다 방콕 내 숙소 하나도 미리 예약해놓지 않아서 출국할 때 '기한 내 태국을 떠나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쓰는 귀찮은 일도 있었다. 한국인은 태국 여행 시 무비자로 최대 구십일 동안 머물 수 있는데, 그들로서는 여자의 얼굴만 보고는 기간 안에 돌아올지 어떨지 판단할 수 없었던 탓이다. 참고로 캄보디아는 비자가 필요하고 라오스는 십사일 이하로 머물 경우 비자가 없어도 된다, 지만 버스로 국경을 넘을 경우 부패한 공무원들로부터 약간의 돈을 요구받는다.


하룻밤 오 달러짜리 숙소. 싸다고 도마뱀 나오는 숙소만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도마뱀이 없는 욕실은 잘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여행하는 동안 여자는 주로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했다. 도미토리부터 샤워실 딸린 일인실까지 그때그때 달랐는데, 캄보디아 프놈펜(Phnom Penh)에서 묵었던 십오 달러짜리 일인실이 가장 고가, 캄보디아 시하눅빌(Sihanoukville)에서 묵었던 이 달러짜리 십이 인실 도미토리가 가장 저가였다. 아마 앞으로도 이보다 더 저렴한 게스트하우스를 만날 일은 없겠지 생각하며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쓸데없이 풍부한 호기심과 도전정신의 결과는 처참했다.


여행 내내 시시때때로 여자를 격려해준 건 대체로 일 달러 정도면 마실 수 있는 동남아 맥주였다. 뜨거운 날씨와 타는 목마름, 비합리적이라고 할 만큼 합리적인 맥주 가격과 종종 만나는 해피아워 원 플러스 원 찬스 덕분에 여행 경비의 상당 부분은 맥주를 마시는 데 썼다.


그 육 주 동안 여자가 여행한 장소들은 다음과 같다. 그저 이름들을 다시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그 여행이 고스란히 환기되는 뜨거운 도시들. 그 이름들.


태국[Thailand]
방콕[Bangkok], 아유타야[Ayutthaya]
캄보디아[Cambodia]
프놈펜[Phnom Penh], 시하눅빌[Sihanoukville], 캄폿[Kampot], 까엡[Kep], 바탐방[Battambang], 씨엠립[Siem Reap]
라오스[Laos]
씨판돈[Si Phan Don](돈뎃[Don Det], 돈콘[Don Khon]), 팍세[Pakse], 볼라벤 고원[Bolaven Plateau], 콩로[Kong Lo], 방비엥[Vang Vieng], 루앙프라방[Luang Prab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