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05)
바야흐로 억새의 계절이다.
도시에 있을 땐 참 보기 어려운 풀이 억새였는데 제주에 오니 세상 흔하디 흔한 것이 따로 없다. 어디에 딱히 나갈 것도 없이 길을 걷다 보면, 일주도로를, 해안도로를 달리다 보면 좌우에 순식간에 펼쳐지곤 하는데 억새가 눈에 띄기 시작하면 이제 진짜 가을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아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어쩜 이런 가사를 썼을까. 작사하셨던 분이 제주도 한 달 살기라도 하셨던 걸까. 그러게요. 가을이네요.
앞서 말했듯 굳이 어딘가 가지 않아도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것이 억새이지만 그래도 유명하기도 하고, 가깝기도 하고 하니, 썩 좋아하지 않는 전어를 가을이면 챙겨 먹는 것처럼 아끈다랑쉬오름엔 한 번 가야지. 왜 전어도 막 당겨서 먹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막상 먹으면 기름이 살살 도는 것이 또 맛있긴 하잖아.
아끈다랑쉬오름의 '아끈'은 작다는 뜻. 말 그대로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은 주차장을 사이에 두고 앞 뒤에 위치하고 있다. 아끈다랑쉬오름은 억새로도 유명하지만 높이가 낮아 오르기 쉬운 오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니 주차하고 내리는 발걸음이 그리도 가볍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오름으로 들어가는 길이 벌써부터 억새밭이 한창이라 사진을 찍기에 바빠 발걸음이 더디다. 이미 이렇게 풍경이 아름다운데 굳이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을까, 위에는 도대체 어떤 풍경이 펼쳐지기에 억새가 유명하다는 걸까 궁금증이 들 정도. 바람이라도 살짝 불어오면 들려오는 솨아아 억새 흔들리는 소리가 절로 입을 다물게 한다. 그렇게 사박사박 발소리만 내며 오름 입구에 도착했다. 자, 이제 올라가 볼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높이가 좀 있더라도 길이 잘 정리되어 완만하게 올라가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올라가겠다만 아끈다랑쉬는 생각보다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운 편이었다. 등산 능력치 최하인 나로서는 세상 이렇게 험한 길이 없다. 오솔길에서 억새 소리에 잠시나마 명상을 즐겼던 차분함은 온데간데없고 으아악 끼아악 곡소리 한마당이다. 그나마 다행히 높이가 낮으니 어영부영 정상에 도착했는데, 과연! 와아 탄성이 절로 나오는 광경이다.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는 담기지 않는, 전혀 '아끈'하지 않은 엄청난 장관이다.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억새의 물결이다. 하얗게 팬 억새가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광경은 뭐라 설명할 길이 없다. 파란 하늘, 황금빛 억새,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바다까지 어우러지니 제주에 있음을 감사하게 해 주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오르는 길이 험하다고 앓는 소리를 했지만 실상은 예쁜 구두에 웨딩드레스까지 차려입고 웨딩 촬영을 하러 올라와 있는 커플들이 잔뜩 이니 뭐, 겁내지 않고 도전해 볼만한 오름이다. 언제든 오를 수 있지만 지금 이때만이 누릴 수 있는 제철의 아름다음이 있으니 가을 전어 챙겨 먹듯 가을 오름 아끈다랑쉬는 한 번 꼭 챙겨보심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