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04)
제주 생활은 확실히 한량에 가깝다.
14년간 회사원으로 살았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남들보다 먼저 사무실에 도착하려면 새벽 네시 반에 일어나 첫 차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회식이라도 있는 날이면 죽어라 술을 마셔 대고는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에서야 꼭 부여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고 쓰러졌고, 다음날이면 아등바등 새벽에 일어나 사무실에 나가 쓰린 속에 커피를 부어 넣으며 내가 이겼다, 묘한 희열감을 느끼던 치열한 날들이었다.
"여전사 같았네. 제니퍼 로렌스처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꽤 전투력 있게 살았었지.
그에 비하면 - 아니 그에 비할 것도 아니지, 이 곳에서의 삶은 한량 그 자체다. 특별히 일어나야 하는 시간도, 꼭 해야 하는 일도 없다. 날씨가 좋으면 해안도로나 중산간로를 슬슬 달리기도 하고, 노을이 예쁜 날이면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기도 하고. 좋은 안주, 좋은 장소, 좋은 사람만 있다면 그것이 언제 어디든 간에 순식간에 술자리가 벌어지고 만다. 그저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시면 된다. 강제로 권하는 이도, 이겨야 하는 사람도 없다.
삼대 해녀의 집은 서귀포 온평리 해안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겉보기엔 제주 어디에나 있는 흔한 해녀의 집과 별다를 것 없는 모습이어서 신경 써 보지 않는다면 그냥 흘려 지나쳐 버릴 법도 한 그런 낡은 풍경.
모둠 해산물을 포장해 갈 요량으로 주문을 했다.
"미역 맛있던데 미역 많이 주세요. 네?"
멍게를 툭툭 다듬으시는 할망 앞에서 되지도 않는 애교를 부리니 냄비에 물을 올리고 계시는 쪽으로 소리를 치신다.
"미역 하영줍서잉"
"많이 많이 주세요"
"내가 하영(많이)이라고 했신디. 하영 멀라?"
"네네, 하영 줍서"
그리고는 가게를 둘러보는데 시선을 끄는 문구가 적혀있다.
'바닷가 빨간 리본 자리. 테이블, 의자 셀프'
호기심에 해안도로를 건너 바닷가 바위를 내려가니 빨간 리본이 매달린 기둥이 두 개 보인다. 근데 어쩌라는 거지. 할망께 여쭤봐야겠다 싶어 가게로 돌아오니 한켠에 다소곳이 접혀있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하! 무릎을 탁!
"저희 그냥 먹고 갈게요. 저 밑에서"
바윗길이 평탄치 않지만 그만큼의 수고를 감수할만한 가치가 차고도 넘친다. 어렵사리 테이블과 의자를 펼칠 수 있는 자리를 찾아 상을 차리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가을 하늘은 높고도 청명하고 바다는 푸르고 바람도 적당하게 불어온다. 간간히 들리는 파도소리는 덤. 세상 이만한 한량질이 또 있을까. 대낮부터 술판이 벌어져 버렸지만 죄책감 따위가 들 리 없다. 이런 풍경을 눈 앞에 두고 술 한잔 걸치지 않는 쪽이 오히러 사치다.
모둠 해산물에는 멍게, 뿔소라, 전복, 해삼, 문어가 나온다. 엄청나게 푸짐하네! 소리가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아쉽지 않은 구성이다. 그리고 하나하나 선도가 매우 훌륭해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없다. 문어도 절묘한 정도로 삶아져 꼭꼭 씹다 보면 은은한 단맛이 올라오는데 이때 소주 한 잔 곁들이면 기가 막히지.
그렇게 한 잔 두 잔.
바다를, 넘어가는 해를 안주삼아 한량 같은 제주에서의 삶에 또 한 점 풍류를 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