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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제주 Oct 19. 2018

목장길 따라 <렛츠런 팜>

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08)


성수기를 넘긴 가을의 제주는 혼자만 알기엔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고 알록달록한 튜브와 검게 그을린 서퍼들이 가득했던 바다는 이제 적당히 한산하지만 쓸쓸하지는 않고, 창창하게 푸르던 오름들은 어느덧 억새가 가득해 은은한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하늘에 더해 여유롭기 그지없다. 여름의 제주가 싱그러운 이십 대와 같다면 가을 제주는 성숙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음, 한 마흔 두 살 정도 여인의 아름다움 같다고 할까. 어떤 일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여유롭게 빙긋 웃어줄 것 같은. 마흔 두 살쯤 되면 그럴 수 있으려나. 나는.






이 날도 속 없이 날씨가 좋다. 올 가을은 미세먼지도 없는지 창 밖으로 보이는 시야가 구만리다. 할 일은 없어도 집에 가만히 앉아 있기엔 어쩐지 억울한 날씨다.


"닐씨가 좋아서 일단 나가려고요. 목적지는 없지만."

"그럼 같이 가자. 김밥 사서 렛츠런 팜 가자"


렛츠런 팜이라, 몇 번인가 지나쳐 간 적은 있는 것 같은데 정확히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 아무려면 어떤가. 야외에서 숨만 쉬어도 기분 좋아지는 날씨이니 말이다. 남조로가 시작되는 조천리까지 해안도로를 따라 슬슬 달린다. 관광객이 빠져나간 바닷가는 한적하고 느긋하다. 햇살이 파도에 부서져 잔잔하게 반짝인다. 그 어떤 보석함이 부럽지 않다. 조천리부터 중산간에 들어서면 나무와 구불구불한 산길이 어우러져 또 다른 매력이 나타난다. 호젓한 남조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덧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 양쪽 다 렛츠런 팜이라고 쓰여 있는데 우리는 본관 쪽으로 차를 향했다.





주차장을 나서자 안내사무소에 말들 사진이 보인다. 이름, 생년월일, 족보, 각종 수상경력 등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바로 렛츠런 팜을 대표하는 씨수말(종마)들이렸다. 렛츠런 팜은 한국마사회에서 우수 종자를 보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운영되는 목장이다.


본관이 위치하고 있는 쪽은 목장 둘레길이 마련되어 있어서 목장 사이사이와 작은 숲길들을 따라 걸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마어마하게 넓은 목장에 말이 한 두 마리씩 느긋하게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은 단어 그대로 '목가적, 전원적'인 유럽 어딘가의 시골마을 그림엽서와 같은 풍경이다.





"와, 여기 엄청 예쁘다. 윈도우 바탕화면 같아"

"그러네 엄청나네"

"근데 그거 알아? 그 윈도우 바탕화면은 이미 너무 옛날 일이라고. 윈도우 XP시절이던가? 지금은 그런 거 안 나와. 옛날 사람들 같으니라고"


둘레길을 걷는 동안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한적하다. 머릿속도 마음도 절로 평안해지는 풍경이라 이런 길이라면 얼마든지 걸을 수 있겠다 싶다. 목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돗자리를 펼쳤다. 바람은 잔잔하고 햇살은 온화하다. 김밥을 하나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며 말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장 종자가 뛰어난 말은 말 한 마리가 거의 천 평 정도의 목장 하나를 단독으로 배정받는다고 하던데 쟤들은 세 마리가 함께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걸 보니 S급으로 분류되는 말은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즐거워 보이는데. 극진히 대접받으며 혼자 지내는 것보다 저 편이 낫지 않나. 우물우물. 우리 마치 풀을 뜯는 말 같네,라고 생각했다. 셋이 모여 앉아 별 생각도 없이 쉼 없이 김밥을 우물거리는 모습이. 어쨌든 즐거우면 됐지.





짧은 피크닉을 마치고 다시 둘레길을 걷기 시작했다. 둘레길에는 삼나무, 산수국, 상수리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수국철에 왔어도 참 예쁘겠다 싶다. 잘 가꾸어진 작은 공원이 나타나며 둘레길이 끝이 났다. 날씨도 좋았고 잘 가꾸어진 목장도 아름답고, 무엇보다도 안심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말들이 행복해 보여서였던 것 같다. 다행이네.





목장을 뒤로하고 함덕 바닷가로 돌아오니 어느덧 해가 저물 시간이 되었다. 벌써 꽃마차가 운행되는 시간이다. 한가롭게 넓은 목장에서 풀을 뜯던 말들을 보고 온 참이라 이 날따라 화려하게 LED조명을 밝힌 조악한 꽃마차를 끄는 말들이 어쩐지 더욱 안쓰럽게 느껴졌다. 꽃마차 말도 나름의 행복이 있을 텐데 내 마음대로 동정하는 것은 미안하지만 오늘은 내 마음이 그렇다, 얘야.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렴.



덧 1. SNS에 올린 이 날의 사진에는 여지없이 '윈도우 바탕화면 같구만'이라는 댓글이 달렸다. 옛날 사람 주변엔 옛날 사람만 있는 법이다. 암만.


덧 2. 트랙터 마차가 운영되고 있는 꽤 귀여운데다 가격도 비싸지 않으니 걷는 게 질색인 분이라면 이용해 보는 것도 좋겠다.





덧 3.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사전에 신청하면 종마 교배를 관람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 너무 그로테스크하지 않나? 그런 취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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