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02)
요즘도 종이인형이나 색칠공부 같은 것, 그런거 나오나? 요새 애들도 그런거 하고 노나? 애가 없으니 알 방도가 없네. 여튼 그 시절 그림에는 하나같이 층층이 레이스가 덧대어진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공주님들이 등장했었는데. 예쁜 드레스를 입고 부채로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 목소리도 소곤소곤 작아야 한다 - 이야기를 나누는 사교계의 삶. 꿈꾸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마 여덟살이나 아홉살 즈음 정도엔 있었을지도.
화려한 드레스도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며 조신하게 호호 웃는 나(!)도 갖을 수 없다는 걸 아는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어쩌다 한 번쯤은 눈이 휘둥그레지는 애프터눈 티 세트를 앞에 두고 홍차 한 잔을 마시는 사치 정도는 부릴 수 있지 않을까. 어쩌다 한 번 쯤.
관광객에게 조천리라는 지명은 꽤나 낯선 곳일지도 모른다. 함덕 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거리이지만 마을을 대표하는 특별한 관광지나 해변이 없는 탓에 애써 찾지 않으면 그저 스쳐지나가 버릴 수 있는 거리에 유독 눈길을 끄는 건물이 하나 보인다. 새하얀 벽에 단정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 여름엔 과감하게 수영복 차림으로 변신을 하기도 - 인상 좋은 외국 할머니 그림에 절로 궁금증이 생기는 곳.
문을 열고 들어서면 차분한 색감과 원목으로 꾸며진 공간이 눈에 들어오는데 가구나 소품 하나하나가 여성스럽고 우아하다.
원더먼트는 홍차 전문점으로 메뉴판을 보면 우와 싶을 정도로 다양한 홍차가 준비되어 있고 무엇보다 맛있는 밀크티(!)를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일부러라도 찾을 가치가 있는 곳이다.
원더먼트의 우아한 분위기의 정점은 바로 테이블 위에 있는 작은 종.
메뉴판을 찬찬히 읽고 - 꼼꼼히 읽어야 잘 주문할 수 있다 - 마음을 정하고는 작은 리본이 달려있는 종을 살짝 흔들면 주문을 받으러 오신다. 물론 나는 종을 흔드는 것이 어쩐지 쑥스러워 꼬박꼬박 메뉴판을 들고 카운터를 찾거나 꼭 할 말이 있는 듯 애타는 눈길로 카운터 안 쪽을 바라보곤 해 주문을 하는 편이지만, 분명 여심을 자극하는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우아하고 고상한 것도 애써 판을 깔아줘도 못 하는 인간이 있다. 쯧쯧.
앞서 말한 것 처럼 애프터눈 티 세트가 딱 어울리는 분위기인데 아쉽게도 애프터눈 티 세트는 없지만 맛있는 스콘과 아몬드 트윌이 그 아쉬움을 달래준다. - 특히 바삭하고 고소한 아몬드 트윌이 아주 맛있다. 가끔 시간을 잘 맞추면 맛있는 빵 굽는 향이 가득하기도 한 것을 보니 베이킹도 직접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홍차와 잘 어울리는 맛이다.
추천 메뉴는 단연코 밀크티. 유당불내증으로 평생을 고통받는 인생이지만 원더먼트에서는 꼭 밀크티를 마시게 된다. 그만큼 믿고 마실 수 있는 맛. 따뜻한 밀크티도 맛있지만 뜨거운 여름엔 시원한 밀크티도 좋다. 커다란 밀크티 얼음 덩어리가 통째로 풍덩 들어가 있어 봉긋한 밀크폼 아래로 얼음을 조금씩 녹여가며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뭐, 유당불내증. 뭐뭐. 배 조금 아프고 말지 뭐. 뭐뭐.
어느덧 유당불내증과 과민성 대장 증후군에 시달리는 나이가 되어 버렸지만 이 곳에서라면 나도 모르게 우아한 분위기에 취해 아홉살 시절의 공주님을 꿈꾸던 어린 소녀가 어느새 툭 튀어나와 버릴지도 모르니 주의해 주세요.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