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박집 주인장이 알려주는 구석구석 제주 이야기 (20)
때는 지난 3월, 제주로 귀한 손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어 선물을 준비하고 싶은데 귤이니 생선이니 생물은 부피도 크고 보관, 이동이 불편한지라 자칫 선물이 짐이 되어 버릴 것도 같고, 흔한 물건은 성에 차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찾아낸 것이 바로 고소리술이었다. 제주도 전통 증류식 소주로 성읍에 위치한 '술 익는 집'이 제주도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어 있다고 하니 선물로 제격이 아닐 수 없어 그 길로 한달음에 성읍까지 달려가 선물할 고소리술과 곧 있을 바비큐 파티에서 마실 오메기 맑은술 두 병을 사서 신나게 돌아왔다.
그리고 며칠 후 바비큐 파티에서 오메기술을 자랑스럽게 꺼내 맛을 보았는데 음? 이건 뭐지 싶은 맛이다. 오메기술을 먹어본 적이 없으니 원래 맛이 이런 건지 알 길이 없어 다들 조심스럽게 말을 아끼던 중 '냉장보관'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고 말았다. 냉장 보관해야 하는 술을 차에 며칠씩 싣고 다녔으니 기세 좋게 쉬어버렸던 것이다. 그렇게 고소리술, 오메기술 둘 다 맛을 보지 못한 채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맛이 너무도 공금해 결국 다시 성읍까지 먼 길을 다시 달렸다.
8개월 만에 다시 찾은 <술 익는 집>은 약간의 리모델링 중이었다. 사실 지난 방문에 대표님이 직접 나오셔서 술 설명도 해 주시고 시음도 하게 해 주셔서 그것을 기대하고 갔었는데 이번엔 대표님도 뵐 수 없었고 집은 리모델링 중 인데다 운영 중인 카페마저 리모델링 기간 동안 오픈하지 않는다고 하시니 내심 낙담하고 말았다 - 다만 현장 할인 10%로 소소한 위로를 받았지만.
갑작스럽지만, 주입식 교육 세대 손? (저요! 저요!)
주입식 교육 세대라면 반드시 외웠을, 국사 똥 젬병이지만 주관식 빈출 문제로 꼭 외워야 했던 것이 있었는데 '삼별초, 강화도, 진도, 제주도' 기억들 나시나? 고려시대 삼별초의 대몽 항쟁 주요 지역으로 아무 생각 없이 외웠던 그것. 제주도에 항몽유적지가 남아있고 현재도 지속 발굴 중인 만큼 그 시절의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 고소리술 역시 당시 몽고의 증류 기법이 전수되면서 발달된 것이라고 하니 그 역사가 참으로 유구하다 하겠다. 그렇게 긴 세월과 제주의 좋은 물이 만나 만들어진 술이니 한 방울 한 방울 귀하게 마셔야지.
일단 도수가 낮은 오메기술부터. 정식 명칭은 <오메기 맑은술>, 알콜도수 16%.
좁쌀과 햅쌀을 반반 섞은 오메기떡을 전통 누룩으로 발효해 맑게 거른 약주로, 이번에 사 오면서 '이 술 맛있는 거죠?'라는 멍청한 질문에 '산미가 있어서 호불호가 갈려요'라는 답변을 주셔서 내심 놀랐다.
맑고 예쁜 노르스름한 빛을 띠는 술을 일단 눈으로 감상하고 향을 맡으니 과연 시큼한 향이 훅 올라온다. 입에 넣으니 그 시큼한 향과 산미가 훅 치고 올라오는데 뒷맛에 은은하게 단맛이 돈다. 인공감미료가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단맛이 돌지? 궁금증이 들면서도 인공의 맛이 아니기에 이런 고급스러운 단맛이 나겠거니 싶은 생각이 뒤따른다. 마실수록 단맛이 점점 느껴져 처음에 강하게 올라왔던 신맛과 조화가 좋고 깔끔하다. 쇼비뇽블랑계의 와인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 해산물 요리나 회와 잘 어울릴 맛이고,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싱싱한 석화에 레몬 폰즈 소스를 곁들여 호로록 한 입 가득 넣고 우물우물 씹으며 시원한 오메기술 한 잔 마시면 참 좋겠다는 것.
다음은 <고소리술> 알콜도수 40%.
좁쌀과 보리쌀로 만든 오메기술을 고소리('소줏고리'의 제주어)로 증류해 만든 증류식 소주로 증류 후 항아리 숙성을 통해 맛을 부드럽게 한다고 한다. 전통주 다운 병뚜껑을 열자마자 올라오는 구수한 향에 절로 취한다. 우리가 흔히 마시는 소주는 알콜향부터 나대는데 고소리술은 향이 젊잖은 것이 양반이 따로 없다. 도수가 높은 편인데도 걸리는 것 없이 목 넘김이 깔끔하다. 소주이지만 구수하고 은은한 향을 제대로 느끼려면 강한 - 맵고 짠 - 안주보다는 조곤조곤 밸런스를 맞출 안주가 좋겠는데, 어디 보자. 그러니까 부들부들 잘 삶은 돔베고기를 간수를 한참 뺀 소금에 살짝 찍어 입 안에 넣고 그 기름기가 채 가시기 전에 한 잔 마시면 딱 좋겠네.
양조장에 가서 구입을 해서 그런지 오메기술은 만든 지 6일, 고소리술은 7일이 되었다. 어쩐지 제대로 된 신선한 맛을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신선한 술을 구할 수 있는 것 외에도 들어서는 순간 입구에서부터 정취가 아름다워 굳이라도 방문할 법한 곳이다. 지난 3월에는 마당 가득 수선화가 피어 있어 술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대표님께서 수선화를 두 송이 꺾어 건네시며 차에 두면 은은하게 향이 좋을 거라고 말씀해 주셨었는데, 겨울 초입의 <술 익는 집>은 수확한 좁쌀을 마당에 말리고 계셨다. 내년이면 공사가 끝나 카페도 다시 운영을 하실 예정이라고 하니 내년 수선화가 필 때쯤 다시 찾아가 보아야겠다. 그때까지 맛있게 익고 있어 다오 고소리술들아,라고 입구에 얌전히 줄지어 늘어선 항아리들에게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