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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인선 Dec 22. 2019

나무가 여는 것들, 앗아먹고 자라기

계절을 열매로 안다.

할머니댁 앞마당에는 대문부터 집문까지 잇는 풀과 꽃으로 난 길이 있었다. 그 길 옆자락은 여러 나무들이 지키고 서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 어깨만치 오는 벽돌 담장 위로 삐져나온 빼곡히 찬 나무들이 괜히 자랑스러웠었다. 각 계절의 초입이 되면 무슨 나무든지 푸른 알맹이를 조금씩 내놨는데 그걸 보면서 무슨 나무인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눈이 녹고 봄이 오면 나무보다 풀들이 먼저 넘실댔다. 민들레가 조금씩 올라오다보면 수선화도 곧장 따라폈고 할머니는 수선화 몽우리가 노랗게 뜨기 시작하면 민들레들을 걷어서 무쳐다가 반찬으로 내주셨다.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가 여기저기서 모아온 꽃들은 봄만 되면 정원에서 풍성하게 펴올랐다. 뭐 하나가 안 필 법도 한데, 다음 봄에도 그 다음 봄에도 꼭 그 자리 근처에 뭉쳐서 올라왔다. 그렇게 봄꽃이 풍성하게 오르면 담장 바깥을 따라 철쭉이 폈고, 담장 안쪽에서는 키가 작아 겨우 담장 끝에 머리를 걸친 앵두나무에 손톱만한 꽃이 기어나왔다. 그렇게 꽃이 피기 시작하면 아빠는 문밖으로 나가서 나를 들어올려 항상 앵두꽃을 만져볼 수 있게 해줬다. 바닷가 동네에 이상하리만치 벚꽃나무가 한 그루도 없었지만 벚꽃을 닮은 앵두꽃은 바닷가에 사는 촌년에게 봄을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그렇게 여름의 초입이 되면 앵두는 작은 초록색 알갱이가 되었고, 빨갛게 익어서 연두색이 아기 새끼손톱만큼 남았을 때가 적당히 새큼하니 먹어도 좋을 때라고 할머니가 일러주었다. 먹어도 좋을 때가 오면 여름의 시작이었다. 빨간 바가지를 담장에 걸쳐두고 나는 담장 안에서, 할머니는 담장 밖에서 앵두를 땄다. 그렇게 한 바가지를 가득 채우면 주방으로 달려가 설탕을 큰 숟가락으로 여러번 둘렀고, 나는 한 번만 더 두르자며 할머니에게 졸라댔다. 그렇게 내가 만족할 때까지 설탕을 쳐대면 앵두를 먹을 준비가 다 된 거다. 할머니는 빨간 바가지를 옆구리에 끼고 나와서 거실 대창을 열고 주방 문을 열어서 바람이 숭숭 들게 했고, 우리는 어른 숟가락 가득 앵두를 퍼올려 먹었다. 달콤하게 시작해서 볼에 힘을 주면 새큼한 즙이 입안 가득 터졌고 침이 잔뜩 고였다. 그렇게 여름을 시작했다.


여름 내내 단단하게 매미들의 집이 되어주던 대추나무에서 매미소리가 잦아들고, 반딱반딱 빛나던 대추나무 잎이 조금 물러지면 대추가 나올 준비가 다 됐다는 증거라고 했다. 그러면 얼마 안돼서 정말 대추가 작게 맺히기 시작했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쭈그렁 대추는 실수로라도 씹으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싫었는데, 초록 알갱이 대추는 빨리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작은 사과 같은 연두색 대추를 참 좋아했다. 연두색 대추를 한창 먹다가 대추가 이제 반이상이 붉어지면 무화과를 먹을 때가 됐다는 이야기였다. 추석이 다가오면 집 앞의 파출소로 달려가서 파출소 앞의 무화과를 따서 순경 아저씨들과 나눠 먹었다. 솜털이 까끌하게 난 무화과를 손톱으로 길을 내서 반을 가르면 하얀 솜이 찢어지듯이 갈라졌는데 생김새와 맛이 매치가 되지 않는 달큼한 맛과 입안에서 각자 나동그는 미끄러운 작은 씨앗의 감촉에 어렸을 때부터 무화과를 참 좋아했다. 파출소는 그 이후로 자리를 옮기고 무성하던 무화과 나무는 베어져서 그 이후로 무화과를 먹지 못했었다. 누구나 먹는 과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흔하지 않은 나무였고, 꽤 오랫동안 무화과를 먹지 못하고 성인이 되서야 무화과를 그 추억 때문에 일부러 추석마다 사먹었다. 그 달큼한 맛이 나면 풍성한 가을이 실감난다.


겨울에는 흰 가루 퐁퐁 묻어나는 곶감을 자주 먹었다. 할머니와 밥을 먹고 전국 노래 자랑을 보면서 꼭 곶감을 하나씩 물고 먹다가 입술에 가루가 묻어서 허옇게 될 때까지 먹게 됐었고, 할머니는 똥이 딱딱해져 배가 아플 거라며 3개 이상은 못 먹게 하셨었다. 달큰하니 입안이 쩍쩍 붙는 곶감을 먹고 배를 통통 두드리면서 낮잠을 한숨 자고나면 배추 된장국과 할머니 전매특허 깻잎절임에 점심을 먹었다. 할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는 배추를 썰어넣고 꽤 되직하고 씹히는 된장을 넣었었다. 바지락살도 넣고 겨울이니까 할머니가 굴을 따오면 굴을 넣은 된장찌개를 먹기도 하고, 굴이 남으면 굴밥으로도 먹곤 했다. 된장찌개에서 두부랑 배춧잎을 건져서 밥 위에서 잘 쪼개서 밥이랑 먹다가도 할머니가 깻잎을 한장씩 떼어서 밥그릇 옆에다 삥 둘러주면 그것과 같이 물을 말아서 먹기도 했었다. 어느날은 생김에 생굴을 얹어서 밥을 조그맣게 넣고 꼬마 김밥을 싸주셔서 쏙쏙 집어들어 달래장 콕콕 찍어 먹다보면 봄이 왔다.


그렇게 나는 흙이 여는 것들을, 할머니가 다듬는 것들을 앗아먹고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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