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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Sep 05. 2019

여행이 연애이라면, 해외 살이는 결혼이다.

바르셀로나 시체스(Citges) 가는 길


오전 10:30, Estacíon de Francia (프란시아 역)

플랫폼을 확인한 후 기차에 오른 우리는 가지고 온 유모차를 접어 발아래 공간에 밀어 넣고, 치지베베를 아기띠에서 꺼내 무릎에 앉히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5개월이 걸렸다. 이 일을 하러 길을 나서기 까지는.


10:50

출발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차는 움직일 생각이 없는 듯, 그대로 멈춰서 있다.

오후 1시 30분까지만 그곳에 도착하면 되니, 기차 출발이 조금 지연되는 건 큰일이 아니다.

'여긴 스페인. 정시에 일이 진행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지...'

그렇게 또 기다림의 시간을 맞이하였다.


11:20

남편 낯 빛이 점점 어두워져 갔다.

여기저기서 기다림에 지친 다른 승객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이제 슬슬 모두의 인내심이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이 기차 출발은 취소되었으니 일단 다 밖으로 나가서 전광판을 주시하고 있다가

다른 열차 플랫폼 번호가 뜨면 그리로 가세요!"

오른손에 무전기를 든 역무원 아저씨가 숨 한번 쉬지 않고 엄청 빠른 속도로 말하고선, 혼자 일 다하겠다는 기세로 다음 열차 칸으로 재빠르게 사라졌다.

무전기에서 터져 나오는 역무원들의 음성이 스페인 사람스럽지 않게 다급하다.

'또 무슨 일이 생겼네 생겼어...'


11:30

"모두들 플랫폼 15번으로 가세요. 15번!"

형광색 유니폼을 입고 열차가 출발해도 된다는 사인을 전달하는 푯말을 손에 든 다른 직원 아저씨가 전광판 앞에 모여있던 승객들에게 다급히 외쳤다.

다급한 목소리에 놀란 우리, 혹시나 기차가 바로 출발해버리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치지베베 안고 달렸다. 3번 플랫폼에서 15번으로.


11:32

"여기가 아니고 저기 저 뒤쪽에 보이는 플랫폼이 15번입니다! 여긴 14번 이라고요!!!"

모든 승객들이 거의 뛰다시피 해서 탑승한 열차에서, 우리를 뒤따라온 좀 전의 그 직원 아저씨가 성난 표정으로 말했다.

'분명 14번과 15번 사인은 붙어있었는데, 도대체 표시를 왜 저렇게 해놓은 거야?!...'


11:57

드디어 열차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서히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 진짜 이만하길 다행이다. 지금 출발하면,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겠다."

이렇게 말하는 내 옆에서 남편은 여전히 회색빛 얼굴을 하고 있다. 아직 안심하긴 이르다는 표정.


끼익...

3분도 채 달리지 않고 터널 안에서 멈춰버린 기차.

남편은 거의 체념의 모드로,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말았다.

'그간의 모든 노력이 허사였네... 진짜 이젠 더는 못해먹겠다.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질 10월의 계획들은 이제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하겠지...'


지난 5월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우리의 스페인 체류 비자 연장.

비자를 처음 받는 것이 아니고 기간 연장임에도, 한국에 있는 주한 스페인 대사관에서 처음 비자를 받았을 때 했던 서류 준비를 이곳에서 다시 해야 했다. 그것도 이곳 스타일에 맞게끔.


새로 개설해야 했던 현지 은행계좌, 오직 비자 연장만을 위해서 가입해야 했던 쓸 일없고 비싸디 비싼 보험, 여러 번의 관공서 예약 그리고, 방문...

마치 결혼식 준비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 같다.

공식적인 결혼 생활의 시작을 혼인 신고서에 서명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해외에서 살기 위해 비자를 준비하는 일은 결혼의 그 과정을 많이 닮았다.

다른 점이라면, 결혼식은 그것을 기다리는 설렘의 공간이 있지만, 비자 연장에서는 거절될까 걱정하는 마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정도.


행정 업무 처리 늦는 걸로 악명 높은 이곳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서 알았고, 이미 일 년 넘게 경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이해하고 대비끝낸 최악의 시나리오도, 막상 당사자가 되어 그 상황 안에 놓이게 되면 또다시 당황하고 좌절스러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6월 초에 최대한 일찍 접수를 끝낸 서류는,

7월 중순에 보험 서류가 불충분하니 보충하라는 통보를 싣고 왔다.

혹시나 문제 생길까봐 가장 유명한 보험사에서 '비자 연장을 위한 보험'이라고 자신 있게 광고까지 하는 것을 들었건만, 역시나 스페인!!!

서류 보충해서 넣고 기다리길 또 한 달.

8월 중순에 비자 연장 허가받은 후 이제 마지막 단계인, 외국인등록증을 위한 지문 인식을 하러 시체스(Citges)에 있는 경찰서로 가는 길이었다.


'지금 못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하면 되지 뭐?!'라고 쿨하게 생각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 없는 이유는 10월에 계획한 가족 방문과 남편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관련된 일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일이 어그러지면, 우리는 꼼짝없이 여기 눌러있어야 한다.

일이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채로.


구구절절 사연이 이렇게나 많은데, 야속한 기차는 이런 우리 이야기는 들어주지 않은 채 터널에 우리를 가둬두고 있었다. 오도 가도 못하게...


"우린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어.

이제 이 일은 우리 손을 떠났고 우리에게 통제권은 애초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일이야. 그러니 내려놓자!"

너무 좌절한 나머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남편을 달래며 말을 마친 순간,

어머 머머... 이게 무슨 조화인가?!

기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젠 믿지 않아. 가다가 또 멈출 거야."

푸념하는 남편의 말을 기차는 또 무시하고 이번엔 진짜로 바르셀로나 시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10년 같은 10분이 어떤 맛인지 제대로 보여준 기차는 그렇게 시원하게 달려주었다.


살랑살랑 원피스 차림에 목에는 옷만큼이나 예쁜 카메라를 멘 두 명의 중국 여자들은 행복한 수다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들 대각선에 앉아 있는 한국인 커플은 다양한 표정의 셀카를 찍느라 정신이 없고, 그 뒤로 보이는 다른 백인 커플의 눈에서도 셀렘과 행복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젠 정말 지문을 찍을 수 있겠다!' 안도하고 나니, 그제야 기차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랬다.

우리가 타고 있는 기차는 바르셀로나의 낭만의 해변 도시 시체스로 향하고 있었다.


그날 그 기차 안에는,

이 나라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며

연애하듯 핑크빛 표정을 한 여행자들의 모습 사이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를 들었다 놨다 하는 스페인과 살고 있는 우리가

어중간하게 끼어있었다.


해외여행은 연애, 외국 살이는 결혼이었다.


바르셀로나 시체스(Citges)의 풍경들. photo by D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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