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식사하다 말고 남편이 '치지베베'(엄마, 아빠가 하루에 피자 한판씩 먹던 어느 날 생긴 아가라...풀네임은 big fat cheesy baby)
모닝풉 했다는 말에 침대로 가서 아가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내 허리에서 난 소리... 빠지직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이 또한 나만은 비껴갈 수 있을 거라 믿었건만, 자만이었다.
논문 쓰느라 육아 돕느라 요리하느라 1인 다역하는 남편이 허리 아프다고 할 때는 건성으로 위로했었다. 임신은 나랑 같이 했음에도 아직 출산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 남편의 볼록한 배는 내 눈에는 그저 운동부족의 상징으로만 보였었다.
"우리가 나이가 많아서 그래. 어쩌겠어, 좀 더 조심하며 육아하자! 무리하지 말고..." 남편 딴에는 위로한다고 한말인데 어째 좀 슬프더라는.
파스 붙이고 물에 녹인 마그네슘으로 소염진통제 원샷한 후, 낮잠 자는 치지베베 옆에 대자로 누운 자세로 브런치를 연다.
바깥 세상이 무척이나 궁금한 베이비보스
7개월 전 오늘의 이야기!
새벽 2시경부터 가진통이 느껴졌다. 오전에출산 전 마지막 산부인과 진료가 예약되어있던 터라 내심 잘되었다 싶었다.
긴 여정이 될 테니 아침 든든히 먹고 집을 나섰다.
이상하다...
택시 정류장에 택시가 한대도 안 보인다.
아직 통증이 못 참을 정도는 아니니 걸어서 병원에 가자 했다.그렇게 도착한 병원.
담당 미드와이프(산파) 수잔나가 내 상태를 체크하더니 하는 말.
"자궁이 이제 겨우 1cm 열렸어. 아직 아기가 나오려면 멀고도 멀었어. 집에 가서 쉬다가 정말 아파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때 다시 병원으로 와!"
말이니 쉽지... 내 진통은 이미 충분히 참기 어려운 강도였다.
"나 그냥 병원에 있으면 안 될까? 어떻게 또 집에 갔다가 다시 올 수 있어? 그리고 아침에 택시가 안 잡혀서 걸어와서 너무 힘들단 말이야."
어떻게든 집에 다녀오는 일만은 피하고파서 더 아픈척하며 수잔나한테 말했다.
"아, 맞다! 오늘 택시 파업하는 날이야. 그런데 어차피 걸어 다녀야 자궁문이 더 빨리 열리니까
꼭 다시 집에 걸어서 가! 병원 침대에 누워있음 24시간 지나도 자궁문 다 안 열릴 수 있어. 무조건 걸어야 해!"
내가 졌다! 24시간 안에도 안될 수 있다는 말에 어차피 몇 시간 안에 큰일 날 거 아니니 집에 가서 아프면 소리라도 맘껏 지르자 싶은 마음에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아아악! 자기, 나 이제 진짜 못 참겠어. 우리 병원 가자."
이미 해는 져서 밖은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택시 파업이라니 걸어가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으니 그래도 조금이라도 밝을 때 병원에 다시 가는 게 좋겠다며 남편도 동의했다.
진통의 간격과 강도는 오전의 그것과 비교할 정도가 아니었다. 다섯 발자국 걷다 멈추고, 길가에 벤치 보이면 앉았다가, 참아보다 안되면 신음소리도 내고.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병원 가는 길에 있는 기차역 앞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신호 바뀌기 전에 다 못 건너고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할까 봐 남편이 거의 나를 들고 건넜다.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가는 거리를 2시간 가까이 걸려서 병원에 도착했다.
이제 자궁이 3cm 열렸단다. 4cm는 열려야 분만실 들어갈 수 있으니 좀 더 참으란다.
'이래서 아이 낳은 엄마들이 그렇게 구구절절 할 말이 많은 거구나' 온몸으로 이해하며 분만실에 들어갔고 무통주사 맞은 후엔 말 그대로 통증 없는 신세계를 즐기다 새벽 시간에 무사히 출산에 성공했다.
일반 병실에 자리가 없어서 분만실에서 오전까지 머물렀다. 호텔방같이 넓고 쾌적한 분만실이었기에 그곳에서 계속 있으면 좋겠다 싶었지만, 곧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넓지는 않아도 2인실이어서 참 다행이었다.
창가 쪽 침대에는 파키스탄 출신 산모가 곧 퇴원할 예정인지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귀를 막아도 들리는 커도 너무 큰 목소리로 옆 산모 아버지가 누군가와 20분째 통화 중. 참고 참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서 남편, "조금만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정중히 부탁했다. 다행히 그쪽도 인지했는지 금세 조용해졌다. 그 후로도 몇 번의 큰소리가 있었지만 그러다 그쪽 산모가 정말로 퇴원을 해서,
'휴~~ 참 다행이다' 했다.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우리 병실로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이곳 현지인 가족. 들어오면서 기분 좋게 인사도 주고받았다. 그 가족은 둘째를 출산했던 터라 첫째 아이도 아빠와 함께 병실에 있었지만 아빠가 최대한 아이를 조용히 시키려는 노력을 했다.
'진짜 다행이다' 했다.
한 명, 두 명, 네 명...
계속해서 우리 옆 침대 현지인 산모 방문객들이 병실로 들어왔다. 옆 산모는 바르셀로나 토박이니 출산 축하하러 가족, 친구, 동료들 오는 건 당연한 일이라 이해했다.
우리나라와는 많이 다른 이곳 문화를 이해 못하는 게 아니었고 좋은 일 축하해주러 사람들이 오는 거 이해 못할 만큼 속 좁은 우리가 아니었다.
조금 시끄럽고 정신은 없지만 어쩌겠는가?!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그래도 외국인인 우리에게 차별 없이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준 병원 관계자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컸었기에 더 참고 이해하려 애썼다.
그리고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온갖 소음 다 듣고 자란 신생아들은 태어났을 때 청력이 아직 발달하기 전 단계라 적어도 아기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방문객 중 한 사람이 기침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의 쿨한 이방인 마인드는 슬슬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 사람도 좀 있다 가겠지.' 그러길 바랬다 진심으로.
그러나...
이 사람 떠날 기미는 전혀 안 보이고 기침의 정도는 결핵을 의심할 수준으로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내가 침대 커버로 텐트 모양을 만들어 갓 태어난 아가를 덮어 가리고, 참다못해 폭발 직전인 남편 옆 가족에게 말했다.
'제발 기침은 밖에 나가서 하고 오면 안 되냐고. 너희도 신생아 있는데 우리 서로 이 연약한 생명 보호해야지 않겠냐고.'
그렇게 이해시키려는 노력 반, 사정 반 했다.
남편이 얘기하니 미안해하고 잠깐 주의하는 듯했다. 아주 잠깐!
"안돼! 우리 병원 원칙상 출산 후 적어도 24시간은 병원에서 지내야 해. 산모와 아기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니 꼭 지켜야 해." 우리에게 늘 친절했던 천사 같은 간호사 마리아가 우리를 달래며 하는 말이었다.
그때 우린 이미 짐 싸서 갈 준비 다 끝내고 아기 앉고 간호사실에 들어갔더랬다.
내일 아침에 다시 병원에 올 테니 제발 집에 가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영문 모르는 수간호사는 '이 외국애들 참 이상하다' 는 눈빛으로 우릴 보고 있었고, 착한 마리아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한밤중에 집에 가려는지 물어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기침 심했던 사람 때문이었냐고? 아니 아니!
그 사람은 그 뒤에 온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양반이었고 그 기침 문제는 문제도 아니었다.
이미 병실은 사람이 더 이상은 들어올 수 없을 만큼 포화상태일 때 한 남자가 또 들어왔다. 마리화나 냄새를 풀풀 풍기며.
이 남자 마리화나 피러 나갔다 들어오기를 수 번 반복했다.
정말로 짐 싸서 집에 가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푱!'
병실 문 앞에서 누군가가 샴페인을 땄다.
제대로 파티를 시작할 모양이었다.
이젠 정말 집에 가야만 했다.
병원 결정을 기다리는 동안 간호사실 옆 대기실에 넋이 반쯤 나간채 앉아있었다.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스페인 비자 신청을 위해 건강검진을 받을 때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떻게 아는 이 하나 없는 외국에서 아이를 낳고 키울 거냐며. 거긴 산후조리원도 없는데 산후조리는 또 어떻게 할 거냐며. 나이도 적지 않은데 산후조리 제대로 못하면 골병든다며, 그냥 남편 혼자 보내면 안 되냐며...'
가족, 친구들의 우리 부부에 대한 걱정은 끝이 없었다.
"괜찮아! 걱정 마! 거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고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출산율도 훨씬 높아. 거긴 길거리 지나다니면 어른 반, 유모차 반이야. 그 정도로 아이들 많이 낳고 사는 나라야. 그러니 걱정 마." 내가 늘 했던 말이다.
그랬었다. 나는 나름 용감했었다.
별일 아닌데 뭘 이런 걸로 호들갑이냐는 표정의 수간호사를 마리아가 설득했나 보다. 대기실에 이 보다 더 나빠질 경우는 이제 없다 생각하며 앉아 있는데 마리아가 밝은 표정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새로운 방으로 안내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