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아파트에 살고 계신 노부부에게 치지파가 치지베베 안고서 인사를 건넨다. 환한 미소를 띠며 할아버지는 손을 흔들고, 할머니에게서는 연신 하트 키스가 나온다.
번개까지 치며 나름 요란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난 오후에 우리 집 발코니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한 번도 직접 만나서 얘기 나눈 적은 없지만 가끔 이렇게 서로가 밖을 보고 있다가 타이밍이 맞으면 눈으로 손짓으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초록색 어닝이 있는 집에는 마음씨 좋고 금슬도 좋은 노부부가 사신다. 두분은 낮의 많은 시간을 발코니에서 보내신다.
혹시나 외국에서 살게 된다면, 발코니 있는 집에서 살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창문도 컸으면 좋겠고 천장도 높았으면 했었다.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작년에 이곳에 와서 집을 구할 때 은근 애를 먹었었다. 빠듯한 예산도 문제였지만, 그 보다 더 큰 산은 이곳은 세입자를 위한 시장이 아니라 철저히 집주인들의 의지대로 굴러가는 시장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요가 공급의 몇 배는 되니 당연한 결과일 테다.
예산에 얼추 맞는 집이라도 보게 될 기회가 생겨서 가보면, 빛이 통과할 수 없게 빽빽하게 들어선 건물들 탓에 그나마 작게라도 있는 창문을 열면 옆 건물 집안이 훤히 다 들여다보였다.
하루, 이틀, 사흘...
점점 불러오는 배를 이끌고 하루 종일 바르셀로나 시내를 걷고 또 걸었다.
'HGTV에서 하는'House Hunters International'에서 보던 그 흥분되고 매력적인 집 구하는 과정들은 도대체 어딜 간 거야?!'
방송 보며 느꼈던 환상은 이미 깨어진 지 오래고, 우리의 현실은 지극히 현실적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인터넷으로 열심히 하트 사인 눌러가며 저장해 놓은 집들은 사진 기술의 발전을 교묘히 잘도 이용한 탓에 실제와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었고, 그마저도 이미 다른 세입자와 계약이 된 상태가 대부분이라 집을 볼 기회조차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몸과 마음은 지치고 초조해졌다. 이러다 정해진 기간 안에 집을 못 구하면 어쩌나 걱정까지 들기 시작했다.
"우리 이 집 계약하자!"
우리 담당 부동산 에이전트 로베르토가 집 문을 열어 보여주는 순간 내 결정은 이미 나 있었다.
어두침침한 건물 현관문을 지나 좁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오르고 올라 도착한 집.
임산부에게 필수인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폭이 좁아 조심하지 않으면 발목 삐끗하기 십상인 계단을 무려 214개 밟고 올라와 만난,
내 인생의 발코니!
코 타오 in 태국 (Koh Tao in Thailand)
칙칙폭폭!
위이잉~~
이른 저녁시간에 방콕을 출발한 기차는 밤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한창 변신 중이었다. 젊은 남자 승무원의 능숙한 손놀림 덕분에 우리가 앉았던 의자는 순식간에 침대로 바뀌었고, 안전을 위해 남편보다는 좀 더 가벼운 내가 위층 침대를 택했다.
발과 거의 맞닿은 곳에 놓인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와 기차가 곡선 철로를 지날 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통에 잠이 들다 깨다가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춤폰 역(Chumphon)에 도착했다.
새벽 5시가 조금 못된 시각. 기차에서 내린 세계 곳곳에서 온 젊은이들로 기차역은 가득 찼다. 피곤한 기색 없이 저마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묻어 나온다.
"코 타오 섬에서 스쿠버 다이빙해보는 것이 항상 내 버킷리스트 일순위였어. 태국은 전에 부모님과 함께 와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성인이 되어서 혼자 여행 온건 이번이 처음이야. 너무 기대돼!"
페리 선착장으로 우릴 실어다 줄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옆에 앉아 있던 독일 청년 다니엘은 흥분을 주체 못 하고 계속 얘기하기 바빴다.
"네? 500밧(THB) 이라고요?"
코 타오 선착장에서 동쪽에 위치한 타놋베이(Tanote Bay)까지 가는 택시비가 500밧이라니...
혹시 우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닌지,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환율로 15000원쯤 되는 금액이었다.
면적이 넓지 않은 섬 코 타오에서는 오토바이를 렌트하거나 택시를 타는 게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우리 둘 다 두발 달린 교통수단은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까닭에 택시를 타는 거 외엔 다른 선택권이 없는 듯 보였다.
"걸어서 가보자!"
거의 동시에 우리 입에서 나온 간단하고 간결한 결론 한 문장.
우리는 그렇게 300원짜리 1.5리터 생수 한 병들고 15000원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며, 코 타오 섬 서쪽에서 동쪽으로 길을 나섰다.
사실, 우리가 걷기를 선택한 것은 돈의 문제였다기 보다는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그곳 현지 물가에 맞게 생활하고자 하는 우리만의 원칙을지키기 위해서였다.
우리가 외국인이고, 관광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주어지는 그대로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방식에 대해 잘못되었다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각자의 기준과 방식으로 사는 것이고, 모든 일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기에.
그리고 우리에겐 튼튼한 두 다리가 있으니 밤새 기차 침대에서 펴지 못한 다리 제대로 좀 써줄 참이었다.
길은 예상보다 험하지도 멀지도 않았다. 언덕을 좀 올라야 했고, 약간의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했으며 마지막은 경사가 있는 내리막길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코 타오 버전 인생 발코니를 만났다.
타놋베이를 닮아 화려하지 않아서 더 평화로웠던 곳. 오전의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었다. 도착 후 알았다. 리조트에서 픽업서비스를 신청하면 되었던 것을...
"자기! 진정하고 물 한 모금 마셔."
흥분한 나를 달래며 남편이 하는 말.
본인들의 실수에 너무 무책임하게 응대하는 직원에게 화가 나서 뭐라고 막 하려던 참이었는데 남편이 그러지 말라며 말렸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라며...
코 타오를 다시 찾았을 때, 타놋베이에서 여정의 반을 먼저 보낸 후 코 타오 섬 서쪽에 위치한 리조트로 옮기던 날. 미리 예약해둔 픽업 서비스를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포기하고 또 걸었다.
지난번 여행 때 이미 섬 이곳저곳 걸어 다니며 두루 둘러보았기에 길 잃을까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지도에 잘못 표시된 길 자체가 문제였다. 지도에는 없던, 밀림 속으로 낸 한 사람 걷기 딱인 폭의 길을 걸어서 가야 했다. 벌레는 나를 헤치지는 않으니 겁낼 일 없었으나, 나 좋다고 달려드는 모기떼에 호되게 당했다.
모기한테 당하고 나니 혹시나 숙소 담당자가 실수할까 봐서 전날에도 확인 이메일 보냈음에도 일이 이렇게 된 것에 심기가 불편했던 거다.
울그락불그락 했던 내 화는 발코니 가득 스며든 저녁노을에 슬며시 가려졌다.
코 타오 섬의 매력에서 헤어나올 수 없게 만드는 해지는 풍경. 낮에 모기에게 양보한 내 소중한 피가 아깝지 않을 만큼 가치있었다.
트로기르 in 크로아티아 (Trogir in Croatia)
보이는 곳마다 물이 맑아도 너무 맑았다.
지중해에서 이렇게 투명하고 깨끗해서 눈이 부시기까지 한 바다를 만날 줄이야.
두브로브니크(Dubrovnik), 스플릿(Split), 풀라(Pula)...
가는 곳마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이 바닷물이 푸르다. 바다 색을 표현할 수 있는 형용사가 가장 많은 우리 언어로도 정확하게 끌어낼 단어가 없는 듯했다.
두브로브닉 해변. 이 물 색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할듯.
'어떻게 이렇게 깨끗할 수 있을까?'
지중해 안에서도 아드리아해로 불리는 크로아티아의 바다는 지형과 기후적 영향으로 일종의 '해양 사막화' 현상이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이로 인해 수중 미생물의 농도가 낮아서 빛이 물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정도가 큰 것이 주요 이유 중 하나라고 한다. 깊게는 물속 120m까지 빛이 도달한다니 그만큼 맑고 푸르게 보이는 것일 테다.
이렇게 바닷물 빛에 눈이 팔려있기를 여러 날.
내가 먼저 입을 떼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한국말을 선뜻 걸지 못하게 만드는, 까만 내 피부는 순수한 갈색 쪽으로 채도를 급격히 높여가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너무 과하면 좋지 않으니 이제 광합성을 좀 덜해야겠다 생각하던 중 만난,
트로기르 발코니!
바다를 보며 넋 놓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던 만큼,
내 머리 꼭대기에 항상 붙어 다니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큰 가지를 뻗고 있던 차였다.
발코니 앞 화단에 심어진 라벤더를 벗 삼아, 내 삶의 지향점인 '디지털 노마드'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보다 실천적인 방식에 대해 연구하는데 하루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화단에서 사이좋게 자라는 라벤더. 매일매일 조금씩 꽃망울을 키워갔다. 떠나기 전에 그 꽃 보고파 조급했던 내 마음과 달리 서두르지 않고 때를 기다리던. 모든것엔 때가 있는 법이라며
탈카 in 칠레 (Talca in Chile)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Santiago)를 출발해 푸에르토 바라스(Puerto Varas)까지 1000km가 넘는 거리를 하루에 이동하는 것은 너무 무리인 듯했다. 산티아고에서 남쪽으로 약 25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 탈카를 선택한 것은 중간에 쉬어가기 좋겠다 싶어서였다.
론니플래닛 가이드북에도 몇 줄로 간략히 설명된 게 전부인 미지의 도시를 찾아 나선 길.
"너희가 예약한 숙소로 적힌 주소가 여기가 맞긴 하는데, 일단은 저기 좀 앉아서 기다려주겠어?"
마을 지도 한 장 못 구한채 길 가던 사람 여럿 붙잡고 물어 물어 찾아온 그곳 일층 로비에서, 안내 직원 '밀라(Mila)'는 입구 쪽에 놓인 소파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여행 목적지 잘못 알고 온 것 아니야?'라는 표정으로 우릴 신기하게 쳐다봤던 현지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따갑게 받으며 걸어온 터였다.
이젠 좀 편히 쉴 수 있겠다 싶었는데 앞뒤 설명 생략한 채 일단 앉아서 기다리란다.
체크인 가능 시간도 훌쩍 넘었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30분쯤 지났을까?!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밀라랑 대화를 잠깐 나누더니 우리 보고 자기 차에 타라고 했다.
"잠깐만 잠깐만! 모르는 사람 차에 타라고? 우리가 예약한 곳은 여기인데 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려는 건데? 만약 당신들 예약 시스템이 잘못된 거라면, 그건 명백히 당신들 잘못인데 왜 우리가 이렇게 피해를 봐야는 거야? 그리고 우리가 저 처음 보는 사람을 어떻게 믿어?"
화가 난 우리 커플, 혹시나 납치라도 당할까 봐서 있는 힘껏 목청 높여가며 강한 척했다.
"진정해 진정해. 저 사람은 너희를 숙소까지 데려다 줄 기사님이고, 너희가 예약한 숙소는 이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동네에 있는 아파트야. 너희가 예약했을 때 이곳 주소가 링크된 건 이 아파트 렌탈 사업 사무소가 이곳에 있기 때문이야." 밀라가 우리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더 좋은 동네에 있는...'이라는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우리는 그렇게 차에 올라 십 분쯤 달려,
그 아파트에 도착했다.
쉼이 목적이 아니었다면, 절대 만나지 못했을
우리가 사랑한 발코니!
연어 빛깔을 한 저녁 노을이 시시각각 옷을 갈아입으며, 멀리서 찾아오느라 고생했다며 한 시간도 넘게 우릴 토닥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