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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Aug 21. 2019

보힌(Bohinj)-슬로베니아

우리만의 길을 걷다 #2

어느 여행지를 가나 산책하듯 걸으며 이곳저곳 누비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 커플에게 보힌은 그야말로 완벽한 곳이었다. 보힌 호수를 둘러싼 크고 작은 산들이 봄의 따스한 햇살을 가득 품고 이제 막 연녹의 새 생명 들을 피워내고 있었다.


4월 중순의 보힌은 그야말로 한가함 자체가  풍경에 그대로 묻어났다. 보힌 호수 주변이 한여름에는 슬로베니아 인들이 즐겨 찾는 휴양지라고 하는데 우리가 머문 그 계절에는 낮 한때 두 세대의 투어버스에서 내려 주변에서 잠깐 기념 촬영하고 가는 관광객들이 머문 시간 외에는 대체로 조용하고 한산한 분위기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막 끝내고 온 우리는 하루라도 걷지 않으면 발에 가시가 돋을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걷기 본능의 지배를 여전히 받고 있었다. 매일매일 걸을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등고선과 거리가 표시되어 있는 지도를 펴놓고 오늘은 어느 능선을 걸어볼까를 고민하며 주체할 수 없는 탐험가적 흥분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그리고 우리만의 길을 정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오늘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먹을까-하는 행복한 메뉴 고민과 함께!


남편이 그린 우리만의 보힌 길-마리안 부부의 방명록에 그려놓은 후 선물로 드렸다. 오른쪽 아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묵었던 곳 앞으로 보힌 호수가 펼쳐져 있다.

첫째 날은 보힌 호수를 끼고 나 있는 산책로를 걷고 또 걸었다. 물이 어찌나 맑고 깨끗한지 호수 속 생물들까지 다 들여다보였다. 봄의 시작점답게 호숫가 들판에는 파릇파릇 새싹들이 돋아나고 있었고 호수만큼이나 맑았던 햇살이 봄의 기운에 힘을 실어주고 있었다. 호숫가 작은 벤치에 앉아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왜 사람들이 이곳을 에덴동산이라 부르는지 제대로 이해가 되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의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불렀다고 말하면 지나친 비유 일터. 슬슬 울릴 준비를 하는 배꼽시계를 달래러 숙소 근처에 있는 동네 마트에 가서 이것저것 장을 봤다. 우리 부부가 여행을 하면서 습관처럼 정형화된 우리만의 공식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숙소는 가능하다면 꼭 부엌이 있는 곳을 정할 것-이다. 입맛이 까다롭거나 못 먹는 음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지역의 먹거리를 즐기고 싶은 게 이유다. 현지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빵을 주식으로 먹는지 마트에서 가장 다양하게 구비하고 있는 식재료는 무엇인지 등등 이런 걸 엿보고 체험해보는 것 또한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가치이다.  지리적 위치로만 보면 이탈리아와 비슷한 식문화를 가졌을 거 같으나 오히려 지형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다양한 채소와 버섯을 이용한 피클류가 진열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아드리아해에 접해 있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거의 내륙국이나 다름없는 슬로베니아는 국토 절반 이상이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평균 해발 고도가 557m 이상이라 한다. 유럽 대륙에서 핀란드, 스웨덴에 이어 세 번째로 숲을 많이 보유한 국가라 하니 채소류를 많이 먹는 이유가 자연스럽게 이해되었다. 적색 양배추로 만든 독일 김치(sauerkraut)도 맛있었지만, 비트 피클이 맛도 도 최고였다.

이른 저녁을 먹고 숙소 뒤로 흐르는 실개천의 소리를 음악 삼아 쉬고 있는데 우리의 호스트 마리안 부부가 우리를 그들의 앞뜰로 초대했다. 다양한 꽃이나 나무들로 꾸미려 애쓰지 않은, 그저 푸른 잔디로 깔끔하게 정돈된 그들의 뜰에서 인위적인걸 배제하고 자연 그 자체와 조화를 이루게 둔 그분들의 자연스러운 멋이 엿보였다. 뜰 한가운데 놓인 흔들의자에 앉아 마리안 부부가 직접 담갔다는 꿀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호수 너머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호수 너머 해지는 풍경


둘째 날은 보힌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뷰포인트로 등산을 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가파르고 쉽지 않은 길이었지만 세상 이치가 그렇듯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느낄수록 성취감은 커지는 법이라 정상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눈물이 날 정도였다. 넋을 놓고 한참을 풍경과 풀내음에 취해있는데 숨을 헐떡이며 정상의 고지를 밟은 젊은 독일 친구'율리아(Julia)'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올라오는 길이 힘들었단다. 금방 올라갔다 내려갈 수 있을 줄 알고 물도 준비하지 않았단다. 원래는 정상에 산장 비슷한 카페가 있는 걸로 지도상에는 표시되어 있었는데 아직 비수기인 탓에 문이 닫혀 있었다. 우리보다 열 배는 지쳐 보이는 율리아에게 우리가 가져온 물을 건네준 후, 등산로 대신 도로를 이용해서 하산을 시작했다. 인적이 전혀 없는 길을 한참을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차가 지나가게 잠깐 도로 밖으로 몸을 비켜  걷고 있는데 앞으로 지나가던 차가 멈춰 서더니 중년의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셨다. 어디까지 가는지 태워주시겠단다. 너무 감사했지만 자연을 더 누리고 싶은 마음에 정중히 거절했다. 그냥 지나쳤어도, 차 안에서 백미러 보고 얘기하셔도 되었을 것을... 일부러 차에서 내려 다가와주신 아저씨께 감동받았다. '이곳 사람들은 참 자연을 닮았다' 또 한 번 느끼며 그렇게 산을 내려왔다.


뷰포인트에서 내려다 본 호수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셋째 날이었다. 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지를 꼽는 순서는 그곳에서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순위와 거의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날이 보힌을 '내가 사랑한 여행지' 순위 상위에 올려놓게 된 그런 날이었다. 엊그제 마리안 부부가 추천해준 레스토랑이 한 곳 있었는데 차로 가면 5분 정도 걸렸을 그 거리를 우리는 산 넘고 마을 건너 네 시간 넘게 걸어 도착했다. 열심히 일한 후 들이키는 맥주 한잔이 항상 더 시원하다 믿는 우리에겐 맛난 걸 먹으려면 몸을 충분히 움직여 배가 적당히 고픈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는 몹쓸 믿음이 있다. 그 믿음에 기초한 그날의 걷기 프로젝트는 우리 숙소 뒤에 있는 서울의 남산 사이즈 되는 동산을 넘어 우리 마을 세 번째 옆동네를 가는 것이었다. 시작은 수월했다. 경사가 완만한 산길을 노란 화살표를 따라 기분 좋게 오르며 중간중간 쉼터에서 쉬어가며 그렇게 동산 꼭대기에 다다랐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보였다. 걸어서 좋은 기분에 곧 맛난 음식 먹을 생각을 하니 기쁨이 넘치고 넘쳤다. 서둘러 내려갈 생각으로 앞으로 걷는데 뭔가가 이상했다. 올라올 때 보고 걸었던 이정표가 없다. 분명 어딘가에 내려가는 길이 있을 텐데 우리가 가려고, 그리고 꼭 가야만 하는 그 방향은 아니었다.


왼쪽에 보이는 마을에 가야하는데 내려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저기 아래로 손 뻗으면 닿을듯한 곳에 우리의 목표물이 있는데 바로 가지 못하고 산을 빙 둘러 다른 마을로 내려간 후 더 가야 한다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미 걸을 만큼 걸었고 내 안에서 내 최대의 약점이 모습을 드러내려 꿈틀꿈틀 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약점은 최대한 짧은 시간에 누그러뜨려야 뒤끝이 별로 없지 안 그럼 주위 사람에게 큰 민폐 끼칠 수 있는 그런 성격적 결함을 포함한다.

일명 '행그리'라고.(hungry 와 angry를 합친 말)

그다지 예민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은 성격의 소유자라고 나름 자부하는 나에게 아킬레스건 같은 행그리!!! 예방이 최고의 치료인 나의 만성질환 되시겠다. 증상으로 말할 거 같으면 두 가지 단계가 있는데 첫 번째 마일드한 단계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묻는 말에 대꾸도 않는다. 이때는 옆에서 누가 건들어도 어느 정도 참을 수는 있다.

문제는 두 번째 심각한 단계-헐크처럼 폭발할 수 있으니 주변 사람들은 무조건 조심해야 한다는.

행그리의 조짐이 슬슬 보이는 관계로 우리는 없는 길 만들어서라도 최단시간에 산을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마을로 내려가는 최단거리 후보 1은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관계로 포기하고, 벌목을 한 후 정리되지 않은 듯 쓰러져 있는 나무들로 길이 군데군데 막혀있긴 하나 조심만 하면 내려갈 수는 있을 후보 2를 선택했다. 경사도 꽤 있었고 오랫동안 사람이 걷지 않은 터라 나뭇잎이 수북이 쌓여 있어 많이 미끄러웠지만 그래도 무사히 마을이 시작되는 길로 내려갈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레스토랑-Emma's pizza. 그곳에서 우리 커플은 '인생 피자'를 마주했다. 땀을 식히기 위해 시원한 맥주 한잔씩 먼저 시켰다. 이 맥주잔 사이즈 참 마음에 든다.-750ml짜리! 다음은 메뉴를 시킬 차례. 레스토랑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피자 맛집으로 이 지역뿐 아니라 슬로베니아 내에서도 유명하다고 한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우리는 레스토랑 이름과 같은 이름의 피자-이스트리아(istria지역) 스타일의 피자로, 토핑으로 짭조름하게 말린 돼지고기(프로슈토)와 큼직한 통 올리브, 사우어크림이 올려져 있는 게 특징인 피자-한판을 주문하면서 뭐 다른 음식 더 시킬 거 없을까 메뉴판을 더 보고 있는데, 이때 우리의 쿨한 직원분의 한마디! '피자 한판이면 너희 둘 먹기 충분할 거야.'라며 메뉴에 대한 자신감 제대로 드러내셨다. 아니나 다를까 오븐에서 갓 구워져 나온 피자의 사이즈는 그야말로 '거대'했다. 성인 네 명이 먹어도 충분할 XXL 사이즈는 될듯한 자이언트 피자.

그런 피자를...



우리 둘이  다 먹어치웠다!!!



얼마나 정신없이 맛나게 먹었던지 사진 한 장 안 찍고 먹기만 했다는.

직원분도 우리가 해낸 일이 대단하다는 듯 주방장 아저씨에게 얘기하며 엄지척으로 칭찬해줬다. 아주 만족스러운 포만감을 느끼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원래 우리의 계획은 우리 동네 전 마을에서 맥주 한잔 더 하고 가는 것이었는데 목까지 차오른 엠마 피자의 위력에 맥주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배가 너무 불러서 걷는 것도 힘들었다. 욕심부린 주인 탓에 다리와 위장이 고생 많았던 날이었지만 그래도 기쁨의 호르몬 충만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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