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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Aug 21. 2019

보힌(Bohinj)-슬로베니아

우리만의 길을 걷다 #1

어제 오후 날씨가 걷기에 불편할 만큼 덥지는 않길래 동네 한 바퀴 돌까 하고 나갔다. 전에 봐 둔 향수 스튜디오에 잠깐 들러서 눈도장도 살짝 찍고 올 요량으로. -시월에 서울에서 향수 공방 하는 선생님이 이곳으로 오시기로 되어있어서 그분께 여기에서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을 소개해드리면 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가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일요일이었지만 다행히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 밝고 따스한 향을 품고 있는 젊은 여주 인분(그녀의 이름은 '바라')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서로를 소개했다. 바라는 남편과 함께 향수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향수 관련 워크숍, 원데이 클래스도 하고 있다고. 본인은 체코 프라하, 남편은 벨기에 출신인데 어쩌다 보니 여기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다며 해맑게 웃었다. 프라하 출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이때를 놓칠세라 내 옆에 있던 우리 남편, 자기가 기억하는 그리 길지 않은 체코어 문장들을 마구 뿜어내며 본인 언어능력 뽐내기 모드에 돌입하셨다! 거의 이십 년 전 남편이 대학생 때 한 학기 동안 프라하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냈었다. 그때 나름 열심히 공부했던 체코어 실력이 아직 약간은 남아있는 거다. 남편의 체코어를 듣고 은근 감동한 눈빛으로 바라가 말했다.

"내 모국어지만 참 배우기 어려운 언어지. 그런데다 체코 밖에서는 쓸 수가 없는 언어라 당신이 이만큼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동받았어."

이 말에 우리 남편이 화답하길, "아니야, 그래도 기본적인 인사말이나 숫자가 다른 슬라브 언어권 나라들에서도 참 유용하게 쓰였어." 그러면서 이야기의 주제가 자연스레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로 넘어갔다.

바라는 슬로베니아가 자기 인생 최고의 여행지였다고 했다. 우리도 그녀의 말에 지지하며 슬로베니아의 깨끗한 자연과 그 자연을 닮아 그것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향수 이야기를 하러 갔다가 슬로베니아 이야기로 끝을 맺고 집에 돌아와 작년 봄에 남편과 걸었던 우리만의 '보힌 길'에 대한 기분 좋은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보힌 호수(Bohinjsko Jezero)의 풍경


슬로베니아 하면 아마 블레드(Bled)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텐데 보힌(Bohinj)은 블레드에서 차로 이십여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곳으로 슬로베니아 북서쪽, 율리앙 알프스(Julian Alps)를 낀, 길이 20km-너비 5km의 작은 도시이다. 요즘은 슬로베니아 일일투어의 시작점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다고.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Ljubljana)에서 출발한 버스가 산을 둘러 낸 구불구불 도로를 지나 블레드를 지나가고 있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어중간한 지점에 낀 여행자인 우리는 구글맵 같은 편안한 문명의 이기를 항상 누리지는 않는데 그때도 그냥 큰 지도 한 장 손에 들고, 대충 '블레드에서 이십 분쯤 걸리겠거니' 생각하며 혹시나 마을을 지나칠까 봐 큰 눈 뜨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마침 눈에 들어온 bohinjska라는 단어. 


'여기다!' 하며 반가운 마음에 버스 기사님한테 이곳이 우리 목적지가 맞는지 물어보는 것도 잊은 채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그렇게 시작된 우리의 에어비앤비 숙소 찾기 대장정.

분명히 우리가 예약한 숙소는 호수를 끼고 있는 조그만 성당 옆에 위치한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호수는커녕 작은 성당 하나 안보였다. 늘 지리에 밝고 길 찾는 데는 도가 튼 남편 덕에 항상 별생각 없이 남편 뒤만 잘 따라다니면 되는 나에게도 이 사건은 나름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이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슬로베니아의  국도를 한참 달려 도착한 작은 산촌 마을이었고 주변에는 도움을 청할만한 이렇다 할 시설들이 없었다는 사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지. 그리고 난 늘 길 찾는데 단 1%의 노력도 하지 않으니 아무 소리 말고 가만있자!' 마음은 먹었으나 아무리 봐도 걸어서 가는 것 외엔 답이 없어 보이는지라 슬슬 신경질 모드에 다다르고 있었다.


걸어야 한다면 걷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지도 한 장 손에 든 우리에게 과연 국도가 아닌 걸을 만한 길이 있긴 한 건지, 또 있다면 얼마만큼 가야 다다를 수 있는지를 모른다는 게 문제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어의 장벽. 작은 카페가 있길래 들어가서 물어봤는데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관계로 미션 실패. 언제 올지 모를 다음 버스를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노릇. 우리가 버스에서 내렸던 곳에 돌아가 털썩 주저앉아 서로 합의하길 두 시간만 기다려보고 안되면 걷자!


문제의 그 지도 한장! 우리가 내렸어야 할 장소는 'RIBCEV LAZ'였으나 우리는 그 보다 한참 전 마을인 'Bohinjska Bistrica'에서 하차.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일이라면 너무 안달복달하지 말자. 어차피 벌어진 일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마음 내려놓고 경치 감상하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 한분이 다가와서 말을 건넸다. 카페 건너편에 있는 본인 사무실에서 우리를 보고 계셨다며. 혹시 도착지를 잘못 알고 내린 거냐고.


 아저씨는 다 알고 계셨다.


심지어 우리가 어디에서 내렸어야 하는지도! 다행히 아저씨 집이 우리의 목적지 초입에 있었고 마침 아저씨는 점심 식사하러 집에 가려는 중이었다며 우리를 태워다 주시겠단다. '와우~남편한테 화 안내길 참 잘했다'라고 안도하며, 낯선 이방인들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신 착한 아저씨에게 무한대의 감사함을 표현하며 그렇게 우리는 무사히 보힌에 도착했다.


오래된 성당옆 우리가 머물렀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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