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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Aug 21. 2019

에콰도르 쿠엥카에서 반지원정대처럼 걷다

El cajas national park in Cuenca

오랜만에 맞는 비다. '써니 스페인'답게 그중에서도 바르셀로나는 비 오는 날을 셀 수 있을 만큼 많지 않다. 한여름의 강한 햇빛도 오늘은 좀 쉬어가라고 아침부터 조용조용 비가 내린다.


몇 해 전 브라질에서 올림픽이 한창이던 8월의 어느 날. 그날도 오늘처럼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걸을 채비를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낯선 풍경을 지나며 한참을 달린 버스가 정차한 곳은 쿠엥카에서 서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악지형의 국립공원(Parque Nacional El Cajas). 해발 고도가 3156m부터 높게는 4450m에 이르는 들쭉날쭉한 언덕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이곳엔 곳곳에 독특하고 다양한 툰드라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우리의 또다른 걷기 여행이 시작된 곳

쿠엥카에서 일주일간 머무는 나름 여유 있는 일정을 잡았음에도 새로운 곳에서의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버리는지라 국립공원 하이킹을 더는 미룰 수 없었기에 날씨가 조금 안 좋았어도 걷기로 결정했다.


사실 쿠엥카에서의 초반 며칠은 고산병으로 잔뜩 화가 난 내 위장을 달래느라 쉬엄쉬엄 보냈었다. 내게는 절대 오지 않을 줄 알았던, 에콰도르 수도 키토(Quito) 공항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시작된 고산병으로 키토에서 여행하는 내내 경미한 두통과 복통이 반복되고 있었는데 그래도  참을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키토에서 쿠엥카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일어났다. 9시간을 크고 작은 산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달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 생애 최악의 멀미와 고산병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그날 아침 속도 안 좋고 혹시나 멀미가 날까 봐 식사를 건너뛰었다는 사실.(여행하면서 아침 굶은 날은 그 날이 유일했다는...) 빈속이라 토할 건 없었지만 복통의 강도가 최고였다. 아픈 배를 움켜쥐고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잠깐씩 내다본 풍경은 내 뱃속 상황과는 너무나 대조되게 아름다웠었다.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간직하고 시작한 '까하스 국립공원' 하이킹!¡Vámonos!


길 초반부터 독특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 잡았다

까하스 공원에는 아주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있는데 보통 당일치기 하이킹 코스로 가장 인기 있는 길은 관광 안내소 'La torreadora Visitors Center'에서 시작하는 route1과 route2.

공원입장료는 감사하게도 무료이지만 하이킹을 하기 위해서는 관광 안내소에 들러 여권을 보여주고 등록을 하는 게 필수다. 공원 자체가 규모가 작지 않은 데다 코스도 다양하고 심지어 캠핑도 가능하기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등록을 꼭 해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길은 1코스였는데 길이 5.6km, 고도 3801m~3982m로 상대적으로 가장 완만한 지형에 핑크색 화살표와 돌멩이로 길 표시가 잘되어있었다. 고산지대에 위치한 공원답게 맑은 하늘을 만나기 어렵다고 하는데 산허리에 걸린 구름과 안개가 이곳의 분위기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한몫했다. 길가에 자세를 최대한 낮추며 자라고 있는 이끼들과 꽃들, 이름 모를 식물들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식물 관찰에 몰입하기를 수차례. 인내심을 발휘하며 내 속도에 맞추어  앞장서서 걸어가던 남편 참다 참다 한마디 한다.'일단 조금 걷자!'라고. 뒤를 돌아보니 출발지점에서 100m도 안 왔네. 식물을 사랑하는 나에게 이런 공간은 블랙홀 같은 곳. 하루 종일 있으라고 해도 있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으나 우리의 시간은 유한했기에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전히 눈은 식물들에 꽂힌 채로.


호수 옆에서 자라난 안데스의 꽃이라 불리우는 'chuquiraga jussieui plant'가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땅이 마를 날이 없는 툰드라 지형인 탓에 걸을 때는 미끄러지지 않게 다리에 힘을 많이 줘야 했다. 경사가  완만한 길을 한 시간쯤 걸었을 그때 눈 앞에 펼쳐진 새로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나 나왔을법한 그런 생전 처음 보는 나무들이 숱한 바람과 비를 견뎌내며 생존에 가장 최적화되었을 자신들만의 모습으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이 숲 속에 그대로 느껴졌다. 마치 '반지원정대'가 된듯한 기분에 취해 숲길을 미끄러지듯 조심조심 내려가고 있는데, 앞에서 걷던 남편 길을 막을 듯 휘어져 자란 나무에 제대로 헤딩 한번 했다. 씩씩거리며 숲길 내려가다 한번 또 헤딩. 이렇게 남편의 수난사는 시작되었고, 나는 '이럴 땐 키가 작은 사람이 무조건 유리한 법이군' 속으로 씩 웃으며 뒤따라갔다.


이 여정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quinua 숲을 반지원정대가 된 기분으로 걷다.


키누아(quinua) 숲을 무사히 빠져나와 다시 완만한 평지를 걸어가던 그때. 남편의 또 다른 수난사가 발생했다. 툰드라 지형을 걸을 때는 바닥에 물이 고여있지 않더라도 살짝 밟아보며 내 체중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단단한 바닥인지 무조건 확인하는 게 필수인데, 앞서 당한 몇 번의 헤딩으로 급 피곤했던지, 남편이 발 디딘 곳이 갑자기 푹 꺼지면서 한쪽 무릎이 제대로 늪지에 빠져버렸다. 다행히 내가 바로 손을 잡고 빼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던 터라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지만 이미 다 젖고 진흙 투성이가 되어버린 오른쪽 바지와 신발에 남편 참고 있었던 신경질 한번 강하게 뿜어냈더랬다.

이럴 땐 빨리 어르고 달래주는 게 상책! 내가 목에 두르고 있던 면 스카프를 벗어 젖은 발과 바지를 얼른 닦아주었다.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은 신속한 대응으로 다행히 남편의 화는 금방 누그러졌고 남은 길을 무사히 다 걸을 수 있었다.


남편이 빠졌던 바로 그 곳. 웅덩이에서 가장 먼곳으로 걸었으나 무릎까지 빠져버렸다.

쿠엥카 시내로 돌아와 저녁식사 재료를 사러 시내 중심가에 있는 전통시장 가는 길에, 아침에 막 공원을 걷기 시작했을 때 내 눈을 사로잡았던 이름 모를 꽃과 너무나도 닮은 어느 할머니의 뒷모습을 놓칠세라 얼른 카메라에 담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닮은 모습의 이끼들 사이를 뚫고 피어난 꽃과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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