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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Aug 21. 2019

노르웨이에서 한밤중에 길을 걷다

Moskenes to Reine

남편이 오랜만에 노르웨이에 사는 친구 레이크니한테 안부 이메일을 보냈는데 바로 답장이 왔단다. 나보다 훨씬 더 꼼꼼한 성격의 소유자인 남편은 틈나는 대로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우리의 소식을 업데이트하곤 한다. 우리만큼이나 스페인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언제든 여유 시간이 생기면 놀러 오라고 초대했고, 꼭 그러겠노라고 답을 받았단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풀어낸 노르웨이에서의 추억 보따리.


시간은 3년 전 가을이 막 시작되려는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며칠간의 시간을 보낸 후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노르웨이 최북단-트롬쇠(Tromsø)로 향하는 길에 생애 꼭 한 번은 가보고 싶었던 '로포텐 아일랜드(Lofoten Islands)를 놓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너무 짧기에 더 애틋하고 아름다운 노르웨이의 여름을 아주 살짝 지난 시기였기에 로포텐 아일랜드로 가는 페리가 많지 않았다.

노르웨이 본토에서 로포텐 아일랜드를 가기 위해서는 북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보되(Bodø)에서 페리를 타야 했는데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페리 터미널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가야 할 터미널이 어딘지 미리 알아두어야 했다. 그리고 여름 성수기를 지난 때라 페리는 하루에 딱 한 번만 운항했다.


¡그것도 한밤중에!


페리 출발시간이 자정을 조금 넘은 때였기에 여유 있게 터미널에 도착해서 쉬며 기다렸다. 넓은 터미널 안과 대조적으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페리는 제시간에 출항을 했고 많이 늦은 시간이라 승선이 끝남과 동시에 페리 안은 금세 수면모드로 바뀌었다. 뱃멀미 예방의 최선책은 잠! 깊은 피로를 얕은 잠으로 보상하며 그렇게 섬으로 향했다.

섬에 곧 도착할 거라는 알림과 함께 선내에도 불이 켜지고 서둘러 내 여행 짝꿍 백팩 둘러메고 페리에서 내렸다.


Hurtigruten terminal- 페리를 타기위해 기다린 터미널. 벽에 걸려있는 목조 판화가 인상적이었다. 성난 파도를 헤치며 섬으로 향하는 목선들.

 새벽 3시 30분쯤 된 시각.

칠흑 같은 어둠에 둘러싸인 선착장.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래도 명색이 큰 페리가 드나드는 선착장인데... 불빛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당황한 우리 커플은 우리와 함께 내린 네 명의 젊은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희 묵을 숙소 예약하고 왔어? 어디서 잘 거야? 우린 이 근처 숙소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어...' 그들에게서 돌아온 대답-'우린 이 근처 캠핑장에서 캠핑할 거야. 여긴 그 캠핑장외엔 다른 숙박시설이 없는 거 같던데...' 그 얘길 듣는 순간 갑자기 뒷목이 뻣뻣해져 오면서 안 그래도 어두운 앞길 더 어두워졌다.


숙소가 없으면 택시라도 있을 줄 알았다. 아니, 택시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택시 타고 우리가 예약한 숙소로 가서 백팩이라도 내려놓고 근처에 문 연 카페에서 아침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페리가 잠깐 멈춰서 있을 때는 그나마 주변이 어느 정도 보였는데 우리만 덩그러니 내려놓고 무심히 페리가 떠나고 난 후엔 정말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해가 뜰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 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날이 밝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 추웠다.


이 여행 세부계획 담당 남편에게 따발총 쏴대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으나 그런다고 달라질 거 하나 없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마음먹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이 여행을 위해 한건 고작 하나! 남편이 여기 어떠냐고 물어봤을 때 좋다고 오케이 사인 날린 거 그게 유일하다. 그런 내가 무슨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싶은 마음에 남편에게 무슨 묘수가 있기를 내심 기대하며 잠자코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남편이 한 짧고 굵은 한마디-

그냥 걷자!!!

그렇게 우리의 달밤에 카미노(camino:걷기)는 시작되었다.


Bodø에서 출발한 페리가 도착한 곳은 Moskenes. 우리의 숙소가 위치한 곳은 Hamnøy. 우리는 달밤에 Moskenes에서 Reine까지 5km를 걸었다.

남편은 누가 보이스카우트 출신 아니랄까 봐 여행할 때는 늘 백팩에 작은 손전등을 하나 넣어 다닌다. 사람은 늘 혹시나 일어날 수도 있는 '만약'의 상황에 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게 남편의 지론. 그날은 그 작은 불빛이 정말 큰일 한 날로 길이길이 남을 테다. 발 앞만 간신히 비치는 그 불빛에 의지해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이 섬에는 도로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 지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한다면 어느 순간에는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있는, 어쩌면 간단명료하고 쉬운 길! 만약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면 아무리 모험심 투철한 우리도 쉽게 발을 떼지 못했을 거다. 길을 걷는 게 인생과 참 닮아있다.


바닷물이 바위와 부딪혀 만들어내는 소리를 귀에 담으며 앞으로 앞으로! 낮에 지나갔으면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었을 테지만 아무것도 안 보이는 깜깜한 밤에는 눈은 거의 닫고 귀만 열고 걸었다. 파도소리가 거세지는 곳을 지날 때는 조금 무서운 생각도 들면서 혼자였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이 일을 둘이기에 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마저 잠시 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발만 보고 걷는데 갑자기 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또 무슨 조화인가 싶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밝아도 너무 밝은 터널이 나타난 게 아닌가! 참 인생 재밌다! 인생은 늘 수학에서의 사인•코사인 그래프의 어느 지점에 있는 것이라고 믿는 내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이라도 해주려는 듯, 그 순간 우리를 꼭짓점으로 안내해주었다.


터널 덕분에 나름 수월하게 가야 할 길의 반절을 지나왔다. 기분 탓인지 아니면 시간상 조금씩 밝아질 타이밍이었는지 터널을 지난 후 눈에 주변이 흐릿하게나마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살았다!'싶은 마음이 들기 무섭게 어깨를 짓누르는 피로감. 아무리 걷는 것 자체가 인생 취미라 할지도 밤잠 없이 어두운 길을 걸었으니 몸이 힘든 건 당연했다. 더군다나 하루 평균 10시간은 자야 제대로 잔 것 같은 내게 밤잠을 건너뛰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저기 앞에 보이는 작을 마을까지만 일단 걷고 그다음 일은 거기 가서 생각해보기로 하고 젖 먹던 힘을 다해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마을.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라 문 연 가게가 없는 건 당연하다 받아들이며(사실 가게 자체가 없었다는.) 주변에 바람이라도 조금 막을 곳 없을까 둘러보는데 다행히 아주 조그만 버스 정류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방에서 여벌의 옷을 더 꺼내 몸에 두르고 가방을 베개 삼아 벌러덩 누웠다. 이제 좀 살  같은 기분에  잠깐 고양이 잠을 청했다. 그렇게 난생처음 노숙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다. 다른 부분보다 손발이 참 시리더라는...


드!디!어! 동쪽하늘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동쪽 하늘에 붉은빛이 감돌았다. Reine까지는 걸어가야 편의점이라도 있을 거 같아서 그곳까지만 걷기로 했다. 다행히 주유소 간판이 보였다. 좋은 징조였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적으로 부여되는 주유소에 대한 이미지-기름만 파는 게 아니고 물과 간단한 스낵도 판다-는 보편성을

과감히 깬 이 주유소는 정말 셀프주유만 할 수 있는 무인 주유소였다는.

5km 넘게 걷는 동안 차 한 대도 안 지나갔던 걸로 봐서 이곳에는 무인 주유소가 있는 게 상식적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래도 주유소 근처에 작은 가게가 있긴 했다. 문 여는 시간이 오전 10 시인 게 문제였긴 하지만.


Reine에 아침이 밝아오는 풍경. 구름이 조금씩 거쳐질때마다 새로운 화강암 봉우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 여기 있노라'하며.


호락호락하지 않았던 로포텐 아일랜드 길!

그래도 해 뜬 후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정말 황홀 그 자체였다. 힘들었던 만큼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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