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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Aug 24. 2019

노르웨이에서 한 달 살기

우퍼(wwoofer)가 되다!


네팔에 언젠가 한 번은 꼭 가고 싶었다. 7.8 규모의 대지진이 발생한 지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던 때,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절실히 필요했던 네팔에 지금 가야겠다 마음먹었다.

자원봉사자 지원을 위해 이곳저곳 알아보던 중에 허탈함이 밀려왔다.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꽤 큰 금액의 돈을 내야 했다. 봉사활동이 끝난 후 받게 될 활동증명서(certificate)를 위한 것이라는데... 항공료, 숙박비는 당연히 자원봉사 지원자인 우리가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증명서를 위해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에 갑자기 화가 치밀었다.

'누가 증명서 필요하다고 했나?!'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하고픈 봉사활동이 아니었는데...

내가 찾아본 곳들만 그런 거였는지 아니면 다른 자원봉사 프로그램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건지, 또 그 당시가 대지진 후라 안전상의 이유로 돈을 많이 내야 했던 건지 그 이유를 지금도 모르겠지만, 그때 나는 사전 조사하면서 이미 지쳤더랬다.

'이건 아니다.'싶었다.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다른 형태의 봉사활동이 없을까 찾아보던 중 우프(WWOOF: World Wide opportunities on Organic Farms) 프로그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우프는 1971년 영국에서 시작된 이래로 현재 세계 143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종의 농촌 일손 돕기 프로그램이다. -유기농가 및 친환경적 삶을 추구하는 곳이 호스트가 되어 그곳에서 일하는 봉사자들에게 하루 4~6시간의 노동의 대가로 숙식을 제공한다.-

언젠가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텃밭에 채소 심고 허브 키우면서 살고 싶은 우리에게 이보다 더 적합한 활동은 없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들었다. 마음먹으면 바로 실행에 옮겨야 정신건강에 이롭다 믿는 우리는 곧바로 가고 싶은 나라를 정하고 우프에 우퍼(wwoofer)로 가입했다.


그렇게 우리는 노르웨이 최북단(북위 70°)에 위치한 트롬쇠(Tromsø)에서 한 달간 농사를 지었다.


Tromsø 시내에 있는 색색의 목조건물들. 북노르웨이에서 가장 많은 수의 목조건물들이 이곳 트롬쇠에 있다고한다. 목조건물의 역사는 1789년 부터.
 Kvaløya(크발러야) in Tromsø

우프 일을 시작하기 전부터 무척이나 궁금했던 게 몇 가지 있었다.

물론, 일순위 궁금증은 우리를 맞아줄 호스트와 우리의 일터, 우리와 함께 일하게 될 다른 우퍼들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건 곧 자연스레 풀릴 궁금증이니 기대와 함께 간직해두기로 하고.

그다음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공부가 필요했던 궁금증. -북극권에 위치한 북위 69°인 북노르웨이에서 어떻게 그린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 식물이 자라는 게 가능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그곳이 트롬쇠  '크발러야'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기후 통계에 따르면 대양을 마주 보고 있는 크발러야 서쪽 해안이 트롬쇠 주 안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라고 한다. 1월 평균 기온이 -1.9°C, 7월의 평균 기온은 11.9°C.

멕시코만류(Gulf stream)와 같은 난류의 영향으로 상대적으로 아주 춥지 않은 겨울 날씨와 나무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란다. 심지어 이곳의 숲을 이루는 나무들은 침엽수보다 활엽수가 더 많았다. 온대지역인 우리나라만큼 잎이 넓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종류의 활엽수가 자라고 있었다.


북극권에서 만난 다양한 종의 나무들 in Kvaløya
우리의 호스트 레이크니를 우연히 만나다.

본격적으로 우퍼로 일을 시작하기 전날 우리는 트롬쇠에 도착해서 시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시내 중심가 작은 광장 앞을 지나다 보니 광장 한켠에 파머스마켓이 열려있었다. 혹시나 우리의 호스트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촉이 와서 그곳으로 향했다. 8~9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 둘과 젊은 여자분, 중년의 여자분 한분 이렇게 넷이서 열심히 신선한 채소를 팔고 있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혹시... 성함이 '레이크니'가 아닌가요?...

역시나!!!

중년 여성분 기분 좋게 웃으시며 본인 이름이란다.

손자들과 딸(리사)과 함께 채소 팔러 나왔다며. 어떻게 바로 알아볼 수 있냐며 놀라셨다. 우리가 알고 있던 정보(중년의 나이, 여성분, 유기농장 운영 중)를 조합해보고 그냥 찍은 건데... 정답이라길래 찍은 나도 놀랐다.

그렇게 우리는 광장에서 우연인 듯 필연처럼

인연으로 만났다.

사실, 우리가 일하게 될 유기농장은 시내와 연결된 다리를 건너서 있는 다른 섬(크발러야)에 위치해 있었는데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이 없는 관계로 호스트가 우리가 묵는 숙소로 데리러 와주기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운 좋게 전날 미리 만나게 된 데다 레이크니 인상이 너무 좋아서 앞으로 우리의 한 달은 걱정할 거리가 없겠다 싶었다.


우리의 호스트 레이크니가 우리를 위해 플랫브래드를 만들면서 웃고있다. 최고의 호스트! 고마워요 레이크니!

레이크니 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아주 다양한 유기농 채소와 허브만큼이나 세계 각지에서 온 우퍼들로 집은 늘 북적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식탁 테이블 위에 그날의 할 일 목록이 깔끔하게 적혀 있었다. 가끔은 누가 어떤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콕 집어져 있는 날도 있었지만 보통은 우퍼들끼리 합의해서 일을 나눠서 하는 자율적 구조. 집에서 이미 한 달 넘게 지내고 있던 일본 친구 '아카네'가 주로 작업반장 역할을 했다.

세상사 다 그렇듯, 농장일도 모두가 선호하는 일 따로 있고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 또한 확실했는데 수확의 기쁨은 모두가 누리고자 했고 닭 모이 주는 일은 서로 미루곤 했다. 언젠가부터 보니 닭 먹이는 우퍼들 중 가장 연장자인 남편 혼자 주고 있더라는. 못생기거나 벌레 먹어서 상품성 없는 당근이나 터닙(turnip 순무의 일종)을 잘게 자른 후 큰 냄비에 넣고 끓여서 닭 먹이를 만들고 이걸 닭장 곳곳에 부어주어야 했는데 이놈의 행그리 닭들 배고프다고 남편 자꾸 쪼더라는. 내가 그러듯...


노동 후의 만찬은 늘 꿀맛이었는데 특히나 신선한 채소를 밭에서 바로 따와서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늘 감사했었다. 일하다가 중간에 목마를 때 농장 곳곳에 숨어있던 다양한 종류의 베리들을 따먹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중 내가 사랑했던 블랙커런트(blackcurrant)의 새콤달콤 쌉싸름한 인생 같은 맛은 생각만으로도 혀끝이 자극된다.

아침은 각자 먹고 싶은걸 찾아먹고 점심은 순번을 정해서 준비를 하는데 메뉴는 전날 미리 만들어둔 음식과 빵, 치즈, 햄 등등.

모두가 기대하는 저녁식사는 바쁘지 않으면 레이크니가 정성껏 맛나게 요리해주었고, 가끔씩은 우퍼들에게 모국의 음식을 만들어볼 기회도 제공했다. 편의점에서 가장 싼 샌드위치와 음료 한 캔을 사면 거의 만원 가까이 나오는 살인적 물가인 노르웨이에서 다른 나라 식재료를 산다는 건 정말 엄청난 모험이다. 가격도 부담이지만, 요리해본 경험이 많지 않은 우퍼들이 과연 모두가 먹을 만한 요리를 만들어낼지가 더 걱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프랑스 청년 '거스'가 일을 냈다. 거스는 우퍼들 중 가장 뺀질이였는데, 일 좀 하는 척하다 사라지기 일쑤고 식탁 예절도 영 엉망이어서 식사하다 코 푸는 게 버릇인... 그래도 우리 남편을 제외하면 우퍼들 중 유일한 남자여서 그런지 다른 젊은 우퍼들은 거스랑 다들 잘 지냈다.(심지어 거스는 그곳에서 베트남 태생 덴마크인 '비엥'과 사랑에 빠졌다는.) 일을 덜 열심히 하는 건 참고 넘겨줄 수 있었지만 요리하는 '척' 한번 보이지 않은 게 은근 괘씸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던지 독일에서 온 일 잘하는 '판지(fanzi)'가 거스한테 넉살 좋게 그렇지만 뼈 있는 한마디 했다.

'거스! 넌 미식의 나라 출신이니 우리에게 고메 푸드 한번 즐길 기회를 주지 않겠어? 그럼 우리 모두에게 아주 영광이겠는데 말이지.'

이렇게 자의 1, 타의 9로 요리를 시작한 거스. 메뉴는 프랑스 가정식 '감자 치즈 그라탱(도피누와즈)'. 싫어할 사람 없을 영리한 메뉴 선택이라 생각했다.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고 기다려도 음식 나올 기미가 없다. 다른 이들은 혼자 요리했어도 한 시간이면 해낸 일을 거스는 심지어 보조셰프로 비엥을 곁에 두고서도 요리는 산으로 갔는지 바다로 갔는지...

그렇게 저녁식사 시간(보통 7시)을 훌쩍 넘기고 모두 배고픔에 예민해지던 차에 드디어 나온 요리.

음........흑......

한 입 맛본 모두들 침묵 모드.

비싼 돈 주고 사준 프랑스 치즈 맛은 온데간데없고 탄맛 제대로 풍겨준다. 그래도 먹어주려고 애써보았지만 이건 코를 막고 먹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대로 굶주린 채로 잠들 수는 없었다.

아니, 배고파서 잠이 오기나 했으려나?!

이때, 대학생 때 파트타임으로 호텔에서 요리했던 경력의 소유자- 흑기사 남편 부엌으로 출동. 10분 만에 맛난 파스타 뚝딱 만들어 왔다. 7시 이후로는 급 웃음기 잃고 심지어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던 레이크니 얼굴에서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


거스 말고 레이크니가 요리 해준 전통 북노르웨이 한 상. 메인 생선요리 루테피스크(lutefisk: 염장 대구 요리) 맛이 환상적이었다.

똑! 똑! 똑!  우당탕탕!!!

한밤중에 누군가 우리 방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인가 놀란 남편 먼저 나가고 이 층 침대서 자던 나도 나갔다. 젊은 우퍼들 얼굴에 설렘과 황홀감이 가득했다. 가장 어린 갓 스무 살의 미국 소녀 '샤샤'가 너무 흥분해서 떨리기까지 한 목소리도 우리에게 소리쳤다.

'저기 하늘 좀 봐! Nothern lights(오로라)이야!'

데크 너머로 보이는 바다와 맞닿은 하늘에 초록빛 물결이 렁이고 있었다. 커졌다 작아지고,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며 그렇게 노던라잇은 9월의 어느 밤에 우리에게 노르웨이에 온 것을 환영하는 화려한 춤 공연을 선사해주었다.

태어나서 노던라잇 처음 보았다는 몇몇 우퍼들은 그날 밤 데크에서 하늘 보며 밤을 지새웠다는.


SMAK 페스티벌


토요일 아침. 다른 우퍼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 우리 부부와 아카네는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트롬쇠 시내에서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SMAK 축제에 레이크니와 함께 나가기로 한 것이다. 그동안 정성껏 수확해서 깔끔하게 준비해둔 각종 채소와 허브를 차에 싣고 레이크니에게 배정된 부스에 보기 좋게 진열했다.

SMAK 축제 준비가 한창인 레이크니의 부스. 갓 수확한 채소들로 가득 채워졌다. 열심히 진열 중인 아카네와 리사.

온 동네 사람들이 거의 다 나온 것 같은 시끌벅적 신났던 축제. 늘 차분하고 조용한 줄만 알았던 노르웨이인들도 축제날 만큼은 화끈하게 즐길 줄 알더라는. 먹을 것 즐길 것 많고 북노르웨이의 문화와 일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던 정말 뜻깊고 행복한 날이었다. 우리 부스 양 옆으로는 전통 노르웨이 유목민인 '사미인(saami)'들이 말리거나 얼린 무스 고기와 무스 털로 만든 다양한 스웨터와 모자 등을 팔고 있었는데 인심 좋은 그분들 우리에게 맛 보라며 비싼 무스 고기도 듬뿍 주셨다.

우리의 그날 임무였던 채소 팔기가 한창이던 때, 서너 명의 할머니분들이 지나가시다가 신선한 채소에 눈길을 주시더니 단번에 알아차리신다.

이 채소가 크발러야 에서 재배되었다는 사실을. 노르웨이어는 인사말 정도만 할 수 있었기에 그분들과 깊은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들도 우리도 크발러야산 채소 최고라며

연신 엄지 손가락 치켜들었더랬다. 그분들의 표정에서 크발러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느껴졌다.


9월의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채소 수확, 판매일이 거의 끝나갔다. 그때부터는 내년 농사를 위해 땅도 고르고 건물 이곳저곳 손볼 곳이 있으면

수리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레이크니가 나더러 창고 외벽에 페인트칠하는 일을 해보겠냐고 묻길래, 당연히 할 수 있다고 내가 하겠다고 나섰다.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서 페인트칠하는데 은근 스릴 있었다. 한참 페인트 칠하다가 문득 생긴 궁금증!

'레이크니~~왜 노르웨이에선 빨간색 건물이 제일 많아요? 전에 로포텐 섬에서도 집들이 거의 빨간색이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예요?'

분명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 같아 물었다.

'빨간색 페인트가 제일 비씨지 않아서 그래~~'

음...그 이유 참 간단하군!


내가 페인트칠한 창고.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시야엔 늘 바다가 들어온다.


한 달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트롬쇠 대학교에서 농업 분야 석사 과정을 밟고 있는 원더우먼 레이크니 덕분에 새로운 식물들에 대한 지식도 많이 얻었고, 흙 만지며 일한 덕에 몸도 마음도 더 자연인에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한 곳에 머물면서 현지인들처럼 일하고 일상을 살았던 그 시간. 그곳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방법은 없을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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