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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eric Kim Jan 06. 2020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비극을 접하며.


바람이 꽤나 부는 밤이었다.

발코니에 걸려 있는 식물이 그리고 혹시라도 화분이 떨어져 밤길을 지나가는 행인이 다칠까 봐 걱정이 된 남편이 자다가 말고 벌떡 일어나 식물들을 거실로 들여왔다.

이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들던 순간, 차단기 스위치가 따다닥 얄미운 소음을 만들며 내려갔다. 남편은 또다시 일어나 차단기를 올리고 돌아와 누웠다.

바람이 한번 휘 하고 불적마다 차단기는 따다닥 하며 내려가길 수차례. '나 잡아봐라'를 외치는 심술궂은 차단기를 두고 그냥 포기하고 자자는 내 말에 남편은 난방을 포기할 수는 있어도 냉장고(특히 냉동실)에 넣어 둔 식재료가 상하는 것을 방치할 수가 없단다. 우리 가족의 먹거리를 전담하는 남편의 책임감을 높이 평가한 나는 그렇게 수십 번을 일어나 차단기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남편과 함께 자는 둥 마는 둥 그 밤을 보냈다.

 

잎새에 이는 바람이 그 옛 시인을 괴롭게 했다면, 1882년에 지어진 건물을 휘감은 그 날의 바람은 이 건물 4층(이라 쓰고 5.5층이라 읽는다)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우리 부부를 괴롭혔다.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화재에 대비해 차단기를 세상에서 가장 예민한 녀석으로 달아놓았을 거라 이해는 한다. 그렇지만 콧방귀같이 얕은 바람에도 반응하는 이 차단기 녀석이 웬만한 큰일이 아니고서는 엉덩이 한번 들썩하는 법이 없는 이 나라 행정처리 관행과 너무나도 대조적이라 쓴웃음이 나왔다.


밤잠을 설치게 만든 설치예술의 극치 화분(이 상태로 있으면 좋은 풍경, 그러나 떨어지면 흉기가 될 수도...)과 한 점의 바람도 놓치지 않겠다며 한밤중에 열일하던 요 녀석-차단기


날이 밝고 난 그 날이었다.

마드리드에서 발생한 기가 막힌 사고로 인해  한창 아름답게 피어오르던 30대 초반의 젊은 한국 여성의 삶이 허망하게 끝이 난 날이.


사실, 이 비극적인 사고 소식을 사건이 발생한 당일 바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원래도 티브이 보는 것을 즐기지 않는 성격인 데다 이곳에서 육아를 하면서부터는 뉴스를 볼 짬이 없었다. 그런데 티브이를 보았다고 한들 알게 되었을 뉴스가 아니었다. 메인 뉴스에서 단 1초도 할애하지 않은 사고였다고 한다. 행정업무처리 속도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 집 건물이 지어졌을 당시와 별반 다르지 않을 이 나라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증거물까지 없애가며 지우기 급급했던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위한 커뮤니티 카페에 올라온 여러 글과 신문기사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마드리드 무서워서 걸어 다니겠나요' 운을 떼며 시작한 Y라는 닉네임을 가진 카페 회원분의 글에는 비명횡사 고인에 대한 애도와 함께  사고가 발생하기 몇 주 전에 비슷한 장소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에 대한 현지 신문기사와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마드리드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건물 보수공사 도중 떨어진 코니스(cornice: 장식용 처마 돌림띠)에 그 건물 아래 주차되어 있던 여러 대의 차량이 크게 파손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마드리드의 기적이라 불릴만한 사건이라고 쓰여있었다.


Y가 이 신문 기사를 포스팅하며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러했. 

그 작은 건물 장식품 하나가 떨어짐으로 인해 처참하게 파손된 차량들을 통해 가늠해보건대,

그날(비극적인 사고 당일) 길을 지나던 한국인 유학생의 머리 위로 떨어진 그 코니스가 가한 충격이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스페인 정부가 그 유일한 증거물을 흔적도 없이 폐기해버린 

유가족에게 '장례처리나 어서 하라'는 비인간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는 현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비슷한 물건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져 차량만 파손한 것은 기적이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자연재해라 말하는 스페인 정부의 비상식적인 논리와 무능함에  할 말을 잃었으며.

애통한 마음에 유력한 증거가 없어서 애태우는 유족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 본인이 찾아낸 신문기사를 올린 것이었다.

  

이 글 하단에 무서운 속도로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P라는 닉네임의 회원분이 Y에게

'이런 사고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이러한 사고에 대처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무능한 게 아니고 그 희생자가 그저 운이 너무 없어서 당한 일 아닌가요?'라며 쓴 댓글이 발단이 되었다. 이 댓글을 읽은 많은 이들이 어이를 상실한 채 '이건 도대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말이냐'로 응수하기에 이르렀고, '팩트가 이것이다'로 옮겨 붙은 말싸움은 서로를 '아줌마!'로 불러가며 감정싸움으로 이어졌다. 끝까지 본인만의 논리를 관철하기 위해 무진 애를 쓴 P는 정말로 속으로라도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글로 옮기며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수도 있다는 듯이 헐뜯고 할퀴는 단어들을 늘려갔고 이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글에도 잔인함이 번졌다.


나는 이쯤에서 휴대폰 화면을 껐다. 서로를 상처 주는 막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동안 글을 쓸 수 없게 내 마음을 옥죄었다.


우리는 타인의 불행을 이런 표정으로 바라보는지도...


몇 주를 고민하다가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타인의 불행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과연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이유로.


몇 번 마드리드에 갔을 때 나도 한 번쯤은 지나갔을 그 길에서 발생한 끔찍한 사고가 남의 일 같지 않은 게 사실이다. 또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돌보며 혹여나 다칠까 봐 노심초사하는 엄마(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다 커서 성인이 되었다고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님을 알겠기에,

애지중지 키운 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故) 이지현 양의 부모님의 아픔이 내 가슴 위에 묵직하게 얹어지는 것도 맞다. 

사고가 발생한 장소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언 손으로 피켓을 들고 서 계신 그분들의 모습이 자꾸만 눈 앞에 아른거려서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분들의 슬픔에 공감할 수 없다면, 그냥 입 다물고 조용히 그분들이 충분히 슬퍼하시게 시간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If you have nothing nice to say, don't say it at all. 좋은 말을 할 게 아니라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낫다. 특히나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은 상황 앞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변변찮은 억지 논리를 두둔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내던진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족들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고(故) 이지현 양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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