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죽음에 대한 엉뚱한 상념

관 속에 커터칼, 핸드폰, 당신 신발 어떤 게 좋을까.

by 드작 Mulgogi

일곱 살 때부터 난, 사후세계가 궁금했다.


드라마 사극에서 사람이 죽은 면 장례를 치르는데, 염을 한 고인이 관에 누워 있던 걸 보고 죽음에 대해 인지하게 됐다. 그리곤 밤만 되면 불이 꺼진 어둠 속에서 내가 마치 사극 속 고인이 된 양 눈을 감고 관속에 누워있다고 상상했다.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고요한 관에 누워 있으면 가족들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곡소리가 들렸다. 고인을 애도하는 3일 장을 치른 후엔 발인식엔 차갑고 딱딱한 흙무덤에 묻혔다. 그러부터 이십 년 후, 실제 땅속에 관을 묻는 걸 본건 친조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다.


나도 나이가 들어 늙으면, 티브이에 나오는 저 사람처럼 죽는 걸까? 죽으면 땅 속에 묻히는 걸까? 땅속에 묻혔다가 혹시라도 깨어나면 어떡하지? 죽은 후엔 할머니도 엄마도 아빠도 친구들도 다신 못 만나는 걸까? 와 같은 질문들을 고작 일곱 살 꼬마는 날마다 밤마다 했다.


내가 죽는 순간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오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지만, 재깍재깍 시간이 계속해서 흘러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게 두려웠다. 게다가 축출하고 차가운 흙속에 홀로 묻힌다니 상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엉뚱한 상념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혹시 의사의 오진으로 내가 죽지 않았는데 죽었다고 판단하면 어쩌지? 의사도 사람이잖아. 혹은 알 수 없는 신체의 신비로운 현상에 의해 장례를 치르고 무덤에 묻힌 후 다시 눈을 뜨게 되면 어쩌지?라는 상상과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당연히 잠은 줄행랑을 치며 달아났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의 코 고는 소리와 숨소리가 들려오고, 할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는 것이 내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안도였다. 그리곤 만약 내가 커서 죽게 되면, 관속에 커터 칼을 함께 넣어달라고 유언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라도 의사의 오진이나 인체의 신비로 내가 관 속에서 벌꺽 살아난다 해도 다시 죽어야 할 것이다. 무거운 흙더미와 관을 뚫고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올 수도 없으테니. 게다가 흙속의 개미와 지렁이가 관속으로 들어와 나를 괴롭히는 건 상상도 하기 싫다. 유언으로 넣어준 커터칼로 손목의 동맥을 끊어 다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우리는 죽으면 어디로 갈까.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더니 서른이 넘어도 '죽음'에 대한 상념은 사라지지 않아서 종종 친구들과 연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루는 술자리에서 친한 언니에게 커터칼 유언 이야길 꺼냈다. 언니는 뭐 그런 걱정을 하냐면서도 대안을 제시해주었다. 커터칼 대신 차라리 핸드폰을 넣어달라고 하란다. 나는 언니에게 되물었다. "만약 핸드폰이 방전되거나 지하 흙 속에서 안 터지면 어떡하죠?" 언니는 "충전을 빵빵하게 해 놓고, 여분의 배터릴를 함께 넣어달라 해" 라며 어이없어했다.


세월이 흘러 현재는 매장을 하는 경우가 드물기도 해서, 내가 죽었다가 관속에서 깨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하지 않는다. 대신 대신 몇 해 전. 이모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부터 화장까지 모두 지켜보았을 때. 죽으면 한 줌 재가 대는 사람의 삶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허무하지 않도록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랑하며 열정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느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그리운 나를 가끔 찾아와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은 두어야겠다고. 진지하게 죽으면 화장보다는 수목장이 좋지 않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언젠가 당신은 죽으면 두려움조차 사라지기 때문에 그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막연히 느끼는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당신의 별 뜻 없이 건넨 그 말 때문에 조금 가셨다.




나의 유년의 밤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정확히 오버랩되는 장면이 영화 ’ 굿바이 마이 프렌드‘ 에 등장한다. 피터 호튼 감독의 1995년 작품으로 에이즈에 걸린 이웃집 어린 친구, 덱스터(조셉 마젤로 분)를 살리기 위한 약을 구하기 위해 함께 가출을 감행한 이웃집 형, 에릭(브레드 랜프로 분)의 우정이 아름다운 영화다. 중학생 때 어린이날 기념 특선 영화로 나와 오열하며 봤던 기억이 있다.


유년시절 내가 했던 상상과 마찬가지로 덱스터 병을 고치기 위해 에릭이 덱스터를 데리고 가출한 밤. 텐트 속에서 덱스터는 우주 천체 속에 자신 혼자 유영하는 상상을 하면. 죽음이 몹시 두렵다고 에릭에게 호소한다. 에릭은 그런 덱스터가 안쓰러워 자신의 더럽고 냄새나는 운동화를 건네며 말한다.


“ 이 냄새나는 신발을 너에게 줄게.

우주에 혼자 있더라도 절대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거야. “


에릭의 더러운 신발을 안고서야 안심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던 덱스터는 점차 건강이 악화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장례식에 다녀가는 에릭은 친구를 잃은 슬픔으로 다리 한쪽을 절룩거리는 듯 보이지만, 실은 그의 발에 구두가 한 켤레밖에 신겨 있지 않아 절룩거리는 것이었다.


이때 까만 구두 한 켤레는 덱스터가 우주를 유영할 때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도록 덱스터의 가슴에 고이 안겨있었고 영화는 끝이 난다. 친구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우정 어린 이 영화는 여전히 우정과 죽음과 유년시절 나의 밤에 대해 생각할 때면 내 생애 가장 감동적인 영화로 남아 있다.


내게도 에릭과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한 적 있다.

한때 그런 친구가 당신이었으면 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신발이라도 그걸 꼭 껴안으면 덱스터처럼 죽음이 두렵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