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연상 작용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오는 반대편 에스컬레이터를 볼 때면 새하얀 피부와 대조적이면서 너무도 잘 어울리는 블루 셔츠의 라이언 필립이 떠오른다. 영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에서의 그. 상대역의 리즈 위드스푼의 귀여움도 한몫했고, 영화를 계기로 둘이 결혼까지 골인했던 이 영화에서 천하의 바람둥이 역을 맡은 라이언 필립, 여자라면 이 영화를 보고 라이언 필립에게 안 빠질 순 없었을 거다. 그만큼 매력적이었던. 이렇듯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억이 연상되는 장소에 가면 늘 과거의 어떤 장면이 지속적으로 상기되곤 한다. 가령 추억의 장소에 가면 함께 갔던 사람과 시간에 대한 집요한 영상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망각의 의자가 필요해
내 기억력이 유난히 좋았던 이유에 대해 자각해 보다가 알게 된 책,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는 세계 최초로 과잉 기억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은 질 프라이스(미국)의 14세 이후 일어난 모든 일상을 거의 완벽하게 기억하는 그녀의 축복과 고통의 시간을 잘 이야기해주고 있다. 좋은 기억이라면 그녀의 증상은 축복이겠으나 사람이 살면서 항상 좋은 기억만 가질 수는 없지 않은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뎌지고 지워져야 할 기억까지 생생하게 기억된다면,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녀처럼 과거의 기억이 통제되지 않고, 강물이 범람하듯 매일 기억이 범람하여 나의 현재를 침범한다면,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럴 땐 앉으면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는 망각의 의자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잊고 싶은 기억은 지워주고,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좋은 기억은 영원히 보관해주는 기억 보관함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어떨까.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이다.
난분분한 기억의 연상 작용이 지나간 밤. 2014년 2010년 그리고 2008년으로 이어지는 기억은 너무 선연하여 그린 후 채색까지 하고 싶게 만든다. 채색하면 유의무방한 미소, 내 기억 속 그대로 살아나 웃어줄까. 반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 반은 특유의 진지한 표정을 번갈아 짓는 네가 여전히 선연하게 그려진다는 것이 내겐 불행일까, 축복일까. 실은 아까까지만 해도 제발 그만 나타나, 하고는 "네 인생 잘 살아가면 되지. 왜 자꾸 나타나서 괴롭히는 건데 ?" 라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의 대사가 떠오를 지경이었는데, 다행이다.
신학자 마르틴 부버가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산다는 것이다. ( To remember is to live ) 라고 했다고 한다. 그만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 살아가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다 없어진 일이 되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면 그건 너무도 공허할 것이다. 기억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해도 이대로 가끔 웃어주면 고마운 거다. 그리고 유년시절부터 유달리 내 기억력이 좋았던 이유, 그건 내가 살아가기 위함이었겠구나 싶어. 꽤 선선해진 바람이 불고, 또 하루가 지나간다. 살아가기 위한 기억을 끌어안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