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네시 무렵. 데임 스트리트 Dame street을 지나 더블린 6구역, 라스 마인 Rathmeines에 있는 비즈니스 관계인 H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다. 가는 길에 아틀란틱 랭귀지 스쿨 ATLANTIC LANGUAGE SCHOOL 앞 호숫가에 백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는 백조의 우아한 몸짓은 더블린의 여유로운 풍경 중 하나다.
저녁으로 먹을 음식과 간식거리를 사서 H의 집에 거의 다 왔을 무렵. 한적한 주택가에 책상 하나 펼쳐두고 세 아이가 까르르 웃고 있다. 뭔가 하고 가까이 다가가 봤더니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적었을 귀여운 글씨가 보인다.
ㅡ 뒤에서 앞으로, 벤지 책 € 2, 장난감 € 3, 몰리문스 책 € 10
ㅡ Back-to Front Benji book for € 2, Toy for € 3, Molly Moons Book for € 10
꼬마 친구들 셋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팔려고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이름을 물었더니 가장 키가 작은 아이가 존 Jhon, 그 아이의 뒤에 서있는 여자아이가 제라 Jarah, 그 옆에 선 남자아이가 마리오 Mario란다. 제라는 존의 누나이고 마리오는 자라의 친구다.
녀석들이 무슨 사연으로 아끼는 책과 장난감을 내다 파는지, 나는 물어보기로 했다.
ㅡ 이거 누구 아이디어야?
ㅡ 내 아이디어예요,라고 제라 Jarah가 답했다.
이번엔 왜 돈이 필요한 거야? 하고 물었더니,
ㅡ 부모님 선물 사드리려고요(To buy parents gift), 라는 답이 돌아온다.
'이 녀석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모님 선물 살 돈을 마련하려고. 각각 아끼는 장난감과 책을 집 앞에 내놓고 행인에게 팔기로 한 것이구나. 이런 귀여운 아이들 같으니라고. 그리고 그들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다시 한번 감격하고 말았다.
이윽고 마리오 Mario가 들고 있던 노란 민들레를 내게 건넨다. 환하게 웃으며 고맙다고 계속 인사했더니 개구쟁이 눈빛이 얼굴에 역력한 마리오가 "We don't need money." 이건 돈 받으려고 주는 거 아니란다.
세상에나 이렇게 맑고 예쁜 아이들이 있을까.
너무 예뻐서 간식으로 사 온 푸딩 세 개를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인사를 건넸다.
하루 종일 미소 짓게 만든 일이었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Abbas Kiarostami 감독의 영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매일 저 아이들을 만나 행복은 머지않은 곳에 있음을 느끼며 배우고 또 감사하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몇 해 전. 공자의 '논어'를 바탕으로 아이들에게 인문고전 교육 봉사에 참가했다. 내가 전담했던 성수와 덕현이 형제, 그리고 인화와 용준이 남매는 잘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그때 나는 봉사라는 명목으로 매주 아이들을 만나 논어 교육을 했는데, 실상은 내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걸 배웠다. 내 안에 턱없이 부족한 사랑이 그들로부터 가득 차올랐던 기억이 떠올라서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미숙하다고 말하지만, 우린 가끔 꼬마 친구들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배운다.
저녁을 먹고 H의 집에서 나왔다. 아이들이 앙증맞은 노점을 벌였던 집 앞으로 석양이 떨어진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아빠로 보이는 사람 주변을 뱅뱅 돈다. 아, 이 동네에 살면 저 아이들을 매일 볼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아쉬움과 해거름을 뒤로 집으로 향하는데. 아이들의 예쁜 마음이 마치 유성우처럼 내 마음에 떨어진다. 언제까지고 이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을 잊지 말자,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