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라는 *그녀의 말을 집어 들고 온 2005년 5월 4일. 그날 이후 내게는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비가 오는 날이면 때때로 늘 이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곤 하는 것이다. “비는 소염작용을 한다.”라고.
토도독 토도독. 빗방울과 창문이 만나는 시간, 비는 창문을 위로하는 동시에 나를 위무한다. 일 년을 만나고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버릇에게. 언젠가, 라는 희망을 품고 오래도록 해후를 기다리는 버릇에게. 비는 토도독 토도독 위로를 건넨다.
자주 배앓이를 하던 어린 손녀에게 할머니는 강아지처럼 희고 작은 손녀의 배를 어루만져 주며 이런 노랠 부르셨다. ‘할매 손은 약손, 미정이 배는 똥배.’ 사르르. 매만져 주는 할머니의 손길(사랑)을 느끼며 스르르 잠드는 것이 어찌나 좋았던지. 이후에도 어린 손녀는 배가 아프지 않을 때조차 짐짓 아픈 척하며 ‘할매, 내 배 아프다. 배 만져 도.’라는 말을 했다고.
자신은 한없이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그 손길은 아프고 상처 많은 사람들의 위무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년 시절 할머니의 손길을 닮은 위로 같아서, 토도독 토도독. 그것이 상처인 줄도 모르고 주고 담담히 받아들였던 수많은 상처의 마음을 살포시 덮어주는, 비는 토도독 토도독 위로를 건넨다.
*그녀 : 결혼과 연애에 대한 가치관을 달콤하면서도 허무주의적 입장으로 풀어내는 일본 3대 여류 작가. 에쿠니 가오리. <당신의 주말은 몇 개입니까>는 에쿠니 가오리가 결혼 2년 가을에서 3년 가을까지 써 내려간 자신의 결혼생활을 테마로 한 에세이이며, 그중 <비>에 관한 챕터에는 ㅡ비는 소염작용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가령 감정의 기복-예를 들면 연애-이 어떤 유의 염증이라고 한다면 비는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ㅡ 라고 쓰여 있다.
#2. 여름 비는, 지상에 살기엔 버거운 슬픔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내리는 것.
매일매일 반복해서 비가 오기를 바랐던 날. 레이첼 야마가타(Rachael Yamagata)가 짙고 먹먹한 목소리로 오버 엔드 오버(Over and Over)를 나를 대신해 불러주었던 날들. 그땐, 다소 이기적인 마음으로 매일 비가 오기를 바랐다. 비가 내리면 나 혼자 슬퍼하지 않아도 되니까. 누구나 가슴속에 그리워하는 사람 한 명쯤 있지 않을까. 비가 내리면 어떤 형태로든 사람들은 슬픔을 느낄 테니. 혼자만 슬픈 건 어쩐지 억울하니까. 비가 내리면 누군가도 나처럼 슬프다는 걸. 그걸 로도 위안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비는 지상에 살기엔 너무 버거운 슬픔이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어 내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다. 별이 된 그것은 ‘슬프면 슬픈 대로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한껏 슬퍼하라’는 어떤 이의 조언에 따라 슬퍼하지 않기 위한 어떤 발버둥도 치지 않았다. 담담하고도 얌전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 것이다.
어느 슬프고 까만 밤에는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고 웅크린 채 슬픔을 받아들였고, 또 어느 화창한 날에는 초라한 자신에 비해 너무도 환한 세상 속에서도 슬픔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슬픔이 지나간 자리를 묵묵히 바라보다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순간이 오면, 밤하늘의 별은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지상으로 떨어지는데 그게 여름 비이고, 지금 내리는 여름 비는 그 슬픔의 잔광 일지 모른다. 아마 나는 그때 몽구스(Mongoose)의 <별이 비가 되던 여름밤>이라는 노래를 듣다가 노랫말 속 그 별은 나의 슬픔이 하늘로 올라간 거겠지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악을 무한 재생한다. 맛있게, 많이. 포만감에 만족스러울 만큼 밥을 먹는다. 따뜻한 물에 오래오래 샤워를 한다. 어질러진 방을 치우고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다. 슬픔이 지나간 자리를 묵묵히 바라본다. 더 이상 슬프지 않은 순간이 온다.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은 제 소임을 다하고 지상으로 떨어진다.
여름 비다.